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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묵상 시리즈 제42강] 호세아와 말라기 예언자/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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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6-29 조회수88 추천수0 반대(0) 신고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구약성서 마지막 강의가 되겠습니다.

오늘 마지막 강의에 우리들이 묵상할 이야기는 호세아서와 말라키서입니다.

이 이야기를 끝으로 구약 42 강의를 마치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열왕기 나오는 아주 못된 여왕 이세벨에 대해 이야기했었습니다.



호세아와 고멜
여러분, 호세아서 읽어보시겠죠?

이 호세아서를 보면 참 팔자가 참 별나다, 참 안 됐다는 측은함이 드는 선지자입니다.

전 시간에 얘기했던 이세벨은 왕비였습니다. 왕비인데 아주 못된 왕비였죠.

그런데 호세아의 부인은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호세아를 아주 힘들게 합니다.

음란 마귀에 빠져 있었는지 아주 음란하게 이을 데가 없었죠.

음란한 짓을 통해 아들 둘을 낳게 되는 아내가 바로 호세아의 부인이었던 겁니다.

남편을 배반하고 창녀로 전락했던 아내, 또 놀랍게도 그 아내의 값을 주고 사 온 사나이.

이 음탕한 여인의 남편이 바로 호세야라는 선지자입니다.

 

호세아에게 참 기가 막힌 하느님의 말씀이 떨어지죠.

순종하라는 말이 떨어지는데 뭘 순종해야 하느냐?

간부에게 사랑을 받고 간음한 여인, 그 여인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떨어진 겁니다.

바로 그 말씀에 호세아는 놀랍게도 순종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경우라면, 아내가 간음을 저지르고 남의 아이를 만들어 왔을 때, 하느님이 ‘네 아내를 그래도 사랑해야 한다.’

이런 순종을 요구한다면 과연 이게 쉬운 일인가?

내가 아는 아주 열심한 형제가 계셨는데 안타깝게도 부인이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았습니다.

그 형제는 술을 한 잔 먹고 나에게 울면서 이렇게 전화했어요.

‘신부님, 저는 호세아가 아닙니다. 호세아는 음란에 빠진 아내, 창녀로 전락한 아내를 돈 주고 사 와 다시 아내로 삼았지만,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했지만, 저는 호세아 흉내를 절대로 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호세아 흉내를 절대로 낼 수가 없다. 호세아처럼 순종할 수가 없다.’라는 그 말에 동감이 갔죠.

 

호세아는 이 음탕한 아내에게 진실한 사랑을 쏟았습니다.

타락한 아내를 참고 견디며 구해내려고 애씁니다.

사실 아무리 하느님의 말씀이라도 음행한 아내와 음행으로 생긴 자식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호세아의 결혼은 사실 처음부터 고뇌의 시작이었습니다.

호세아의 위대함은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하느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다는 점입니다.

 

저는 한 평생 교우들을 가르치면서 정말 강조하고 강조했던 건 뭐냐?

‘신앙이란 즉 순종이다, 순명이다.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지만, 내 머리로 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명령이지만,

일단 ‘네’ 하면 그 결과는 분명히 하느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얘기를 참 무수히도 많이 했습니다.

또 저도 사실 그렇게 살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이라면,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쁨으로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이것을 말하여 신앙이라고 우리가 얘기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이상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느님은 실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하는 확신, 이것이 우리를 강하게 하고 순종하게 하는 힘일 겁니다.

‘순종’이란 약한 것이 아니죠.

순종하는 자는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약한 자는 절대로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하느님에 대한 신뢰 때문에 받아들이는 일은 약한 인간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자는 약한 자가 아니라 강한 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 기도드린 말씀은 우리의 모범이 됩니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뭐라고 그랬습니까?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둬주십시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이렇게 얘기하셨죠?

분명히 ‘하느님이 원하는 대로 하옵소서’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중요한 기도 테마였을 겁니다.

그분은 어느 기도든지 항상 기도 끝에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분명히 기도하고 사셨던 분일 겁니다.

 

우리들은 싫은 것이 참 많습니다.

병이 드는 것도 싫고, 재난을 당하는 것도 싫고, 더군다나 죽는 것도 싫고, 재물이 없어지는 것도 싫고, 아무튼 등등,

우리들은 좋은 것보다는 싫은 것이 수두룩합니다.

이렇게 싫은 것이 많은 사람은 절대로 주님이 하셨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그 기도를

폐부에서 솟아나게끔 절대 기도할 수가 없는 사람일 겁니다.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하든지, 청혼의 기도든 감사의 기도든, 설령 달라는 기도든 때로는 기복적인 기도라도,

기도 끝에 ‘주님,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기도로 끝맺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어떠한 경우라 해도 확실히 평화를 갖게 될 겁니다.

 

호세아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해 여느 사람 같으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아내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멸시하는 음탕한 아내를 진실하게 끝까지 사랑하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이 호세아의 순명과 호세아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비로소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깨닫게 됩니다.

진솔하게 생각해 보면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결코 진실하지 않습니다.

항상 하느님을 배반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을 무시하는 존재입니다.

그 인간에게 인내로써 하느님은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호세아는 단 한 사람, 아내의 배반에도 뒤흔들리는 자신을 보면서, 아마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분명히 깨달았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유일하신 하느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로 달리는 사람들에게 굳건하게

하느님 말씀을 전달할 수 있는 선지자로 살 수 있었던 겁니다.

 

호세아의 이 음탕한 여인과의 결혼에 대한 해석도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음탕한 여인과 결혼했다는 설도 있고요. 결혼한 후에 호세아를 배반하고 창녀가 된 것을 되돌려 왔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여인은 몇 번인가 남편을 배반한 여자인 것만큼은 틀림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무수한 배반에도 그 여인을 사랑하라고 하는 하느님의 말씀에 호세아는 순종합니다.

 

순종은 이성을 초월합니다. 합리주의를 초월합니다. 지성을 초월합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하느님이 우리에게 순명하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까 말씀드렸죠?

하느님에게는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고, 그분의 계획은 실패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믿고 일단 ‘네’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축복을, 순명을 통해서 분명히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호세아를 생각하면 순명하는 사람, 물론 모든 선지자가 다 순명했지만  호세아는 좀 특별한 순명을 했던 사람입니다.

여러분들 한번 읽어보십시오.

재밌기도 하고 좀 황당하기도 하지만, ‘이런 것도 순명하는 것이구나’를 느끼게 될 겁니다.
 




과부의 렙톤 두 닢
이제 마지막으로 말라키서입니다.

구약성서 예언서의 제일 마지막 책입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로 시작된 구약성서가

예언서의 제일 마지막 책인 말라키에서 어떻게 끝나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흥미 깊은 일입니다.

 

‘말라키’라는 그 말의 뜻은 ‘나의 사자’라는 뜻이죠.

이 예언의 시대도 아마 짐작하는데 상당히 불신앙의 시대였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물론 말라키 선지자의 시대에만 불신앙의 시대는 아닐 겁니다.

인간은 어느 시대에나 불신앙적이었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믿음 없는 삐뚤어진 세대를 한탄하신 적이 있었죠.

 

하느님은 선지자 말라키를 통해서 그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계십니다.

‘나를 공경함이 어디에 있느냐? 또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불신을 향한 날카로운 지적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코웃음 쳤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이 제사장들아!’

이렇게 말라키의 입을 통해서 하느님이 호통치십니다.

 

제사장은 하느님을 받드는 사람이죠.

지금으로 말하면 신부나 목사가 불신에 빠졌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모시는 사람이 하느님을 비웃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그렇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 불신과 비웃음이 극도에 달하였다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소위 제사장들이 갖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불신앙의 결과는,

예를 들어 제물로 바치는 소나 양을 눈이 먼 것, 또는 다리를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바쳤습니다.

즉 버려도 아깝지 않은 흠 있는 것을 제물로 바치고도 태연한 제사장 시대였던 겁니다.

 

제가 피정 때도 그런 얘기를 많이 했죠.

구약이나 신약에 흐르고 있는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되려면 세 가지 특징이 필요하다.

첫 번째 바치는 제물에 흠집이 있으면 안 된다.

두 번째, 살아있는 제물을 바쳐야 한다.

세 번째 바치는 사람이 직접 제물을 들고 제단 앞에까지 나와야 한다.

이 세 가지의 기본이 충족됐을 때 하느님은 그 제물을 기쁘게 받으시는데,

말라키 시대에는 제사장들이 하느님을 우습게 봤기 때문에 눈먼 짐승, 불구가 된 짐승, 병든 짐승 등을 제단 앞에 바쳤던 겁니다.

버려도 전혀 아깝지 않은 흠집이 있고 죽어가는 것을 제물로 바치고도 태연하게 거룩한 척 제사장 노릇을 했던 시대였습니다.

집에 손님을 대접할 때 고기, 생선도 좋고 싱싱한 것, 큰 것으로 대접해야 마음이 편합니다.

만일 손님에게 버려도 되는 과일이나 과자를 내놓고 본인들은 크고 신선한 것을 먹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을 알아챈 손님은 두 번 다시 그 집에 가지도 않고 일생 그 사람과 절교하고 말 겁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신자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헌금도 이것과 흡사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헌금으로 바쳐도 배 아프지 않을 정도. 그것도 아까워하면서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느님은 한 번도 우리에게 돈을 요구하신 적 없습니다.

하느님께 은혜를 구하라고 요구하고 계시죠?

하느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돈을 내놔라.’가 아니라 ‘나에게 은혜를 구해라.’입니다.

은혜를 구한다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헌금이란 그 신뢰를 표현하는 한 가지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라키서 3장 10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바친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바치지 않으니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냐?

이 천벌 받을 것들아, 너희 백성은 모두 나를 속이고 있다.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 양식으로 쓰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주는지 갚아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수입의 10분의 1이라고 한다면, 5만 원 월급인 사람은 5천 원이 되겠고, 10만 원의 사람은 1만 원이라는 액수가 됩니다.

사실 이것은 좀 힘에 넘치는 금액이 됩니다.

전에 본당 신부 할 때 그분의 직업상 내 생각보다 교무금을 훨씬 많이 내시는 분이 있었죠.

그래서 그냥 사석에서 ‘교무금 내시는데 힘들지 않습니까?’ 물었죠.

그랬더니 그분은 ‘예, 사실은 좀 힘에 넘치는 액수지만 기쁘게 내고 있습니다.’

그냥 웃으면서 그 한마디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해마다 조금씩 더 올리셨어요.

‘참 훌륭하신 분이다. 분명히 저 양반 월급에 상당한 금액인데, 또 그것을 오케이 하는 부인도 대단한 신앙인이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하여튼 버려도 아깝지 않은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말이 되겠죠.

그냥 버려도 아깝지 않아 하느님께 그냥 바친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형편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 ‘10분의 1’이라는 이 의미는 굉장히 쓰라릴 때가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반대로 10분의 9라도 힘겹지 않은 재산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다소 힘에 겨울 정도로 바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10분의 1을 바쳤을 때 다소 버겁고 힘이 들더라도, 말라키서에는 그렇게 봉헌하면 하늘 문을 열고,

하늘 창고 문을 열고 복을 주신다는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정말 하느님이 그렇게 하실까요?

‘온전한 십일조를 나의 창고에 들여놓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라. 내가 주는지 안 주는지 두고 봐라.’

하느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성서에서 금하고 있는 말이죠.

그러나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촉구하고 계신 겁니다.

아마 이것으로 봐서 당시에도 십일조를 바치는 자가 분명히 적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천주교 신자들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십일조를 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아마 개신교는 신자가 몇십 명이 안 돼도 교회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서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 몇 프로나 될까?

힘에 넘치도록 바친다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의 사람은 어느 때에나 흔하지 않은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액수가 남보다 많으냐 적으냐 이것이 문제가 아니고요.

자기에게 그 액수가 버려도 무방한 것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되겠다는 말이 핵심입니다.

 

신약성서 마르코 복음 12장에도 이런 기록이 되어 있죠.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사람들이 헌금궤에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잘 차려입은 부자는 으스대며 많은 돈을 넣었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동전 한 닢만 넣었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뭐라고 그러십니까?

‘가난한 과부는 헌금궤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넣었다.’

부자는 풍족한 중에 넣었지만, 저 과부는 가난한 중에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를 모두 넣은 것이다.

만일 과부가 저녁 양식 살 돈까지 넣었다고 한다면, 과연 그날 저녁 과부는 굶었을까요?

하느님이 그 과부를 굶게 했을까요? 아닐 겁니다.

주님 되시는 하느님은 우리 금액의 다소를 보시지 않고 우리의 신앙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만일 헌금할 때 헌금궤 앞에 예수님이 지키고 계신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헌금 액수는 분명히 달라질 겁니다.

실제로 하느님은 우리를 분명히 보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자기의 전 재산을 바친 과부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적어도 좀 힘에 넘치는 액수를 기쁘게 바치는 신앙을 갖기를 저는 소망합니다.

 

이 말라키서를 읽으면 저는 곧 하깨(하카이)서가 생각납니다.

예언자 하깨를 통해서 하느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죠.

‘이 백성은 아직 주의 성전을 지을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너희는 어찌하여 성전이 무너졌는데도 아랑곳없이 벽을 널빤지로 꾸민 집에서 사느냐?

산에 가서 나무를 찍어다가 나의 성전을 지어라.

너희가 나의 성전 무너진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집만 짓느라고 바삐 돌아다닌 탓이다.’

방금 읽어드린 하깨서의 이 말씀은 우리가 성당을 건축할 때, 우리들의 결의를 다질 때, 우리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독립을 위해 미국에 건너갔던 이민자들이 자기들의 집을 세우기 전에 먼저 했던 것이 뭔지 아시죠?

교회를 건축했던 겁니다.

 

우리들의 생활이 자기의 형편을 중심 삼겠느냐, 아니면 하느님을 중심 삼겠느냐?

이 문제를 우리들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서는 자기의 생활에서 이런 질문을 하게 요구합니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성서를 읽을 때마다 바로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게끔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앞으로 성경을 읽을 때 이런 것을 물으면서 읽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고는 성경은 그냥 겉핥기식이요, 영적으로 재밌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그 깊이를 알 수 없게 됩니다.

남의 이야기요, 2천 년, 전 3천 년 전 중동지방의 이야기일 뿐 나의 이야기가 안 됩니다.

그리고 나의 삶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성서의 말씀이 그냥 남의 나라 역사를 한번 읽어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참 빛을 깨닫게 해주질 못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바로 나의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못된 인간은 바로 내가 될 수 있는 것이오,

또 참회하는 그 인간도 바로 내가 될 수 있는 것이오.

누구를 살인하는 그 인간처럼 나도 누구를 영적으로 살인하는 살인자가 될 수도 있죠.

성경은 나의 이야기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성경이 주는 그 참 빛을 깨닫지 못한다면,

100번을 읽는다고 한들 성서를 외우고 지식은 늘어날 수 있어도 우리는 완덕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주는 참된 빛에 우리들은 밝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들은 어둠에서 빛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 빛을 찾아서 성경을 읽어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구약성서의 첫머리에 ‘하느님은 빛이 있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갖는 무게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그동안 42강인가 좀 헷갈리지만, 아무튼 긴 강의 재미도 없는데 열심히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시작할 때 얘기했거니와 저 역시도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다시 한번 성서를 읽고 정리하고,

또 여러분들에게 정말 쉽게 전달할 수 있게끔 도와달라고 성령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준비하고 말씀을 녹음했습니다.

녹음된 이 강론은 아마 유튜브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은 흥미가 없다 하더라도, 어느 때 나 정말 구약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신다면

그때 도움 되기를 바랍니다.

또 지금 성경 공부를 하고 계신 분이 계신다면 중단하지 않는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이제 구약성서가 끝났기 때문에 당분간은 제가 좀 쉬겠습니다.

그리고 주일 미사 강론만 계속해서, 아마 실시간으로 2주, 4주는 동영상으로 올라갈 거고요.

1주, 3주는 음성으로만 올라가게 될 겁니다.

앞으로 무엇을 준비해서 여러분과 평일에 다시 만나게 될지 저도 기도하는 가운데 분별을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짧으면 짧고 길면 긴 구약성서 강의 경청해 주시고, 또 여러분들의 삶에 도움이 되셨다고 한다면

저의 그동안의 어떤 노고는 주님께서 다 갚아주신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해서 사랑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거듭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그 수많은 테마는 남의 테마,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라고 하는 것을 늘 대입해서,

어느 주인공이 나오든지 바로 여러분을 쳐다보는 마음으로 그 성서를 읽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강복 드리겠습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강의를 들었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축복을 내려주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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