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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영진 신부님_<탈리타 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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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6-29 조회수64 추천수3 반대(0) 신고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마르 5,22-23).”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5-36)”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5,39).”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마르 5,41-42).”

 

 

 

1)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이야기들”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죽은 당사자’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가족’을 위해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루카 7,13).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도 역시 일차적으로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위한 기적이었습니다(요한 11장).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도, 그 소녀가 아니라

 

그 소녀의 부모를 위해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우리는 그 소녀가 예수님을 알고 있었는지,

 

또 예수님을 믿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 이야기에서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죽은 당사자’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가족’을 위해서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살리신 기적은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계시하기 위한 표징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 덕분에 다시 살아난 이들은 나중에 다시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적은 그들의 수명을 ‘조금 더’ 연장시켜 주신

 

일인데,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나중에(종말에)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지 어떨지는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었다가 예수님 덕분에 다시 살아난 일은,

 

살아난 것으로 완결된 일이 아니라, 그 사람들에게

 

새로운 숙제를 주신 일이 됩니다.

 

그 숙제는 기적을 체험하고 크게 기뻐한 가족들에게도

 

주어진 숙제입니다.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다면,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 바로 그 숙제가 주어진 것입니다.

 

 

 

2) 누구에게나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은 큰 슬픔과

 

큰 고통이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예수님 덕분에 살아난

 

일은 분명히 큰 기쁨인데, 그 사람이 나중에 다시 죽음을

 

맞이할 때, 이미 한 번 겪었던 큰 슬픔과 큰 고통을

 

또 겪는 일이 되어버리면, 그러면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 꼭 기쁜 일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그런 것을 생각 못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지상에서의 수명을 조금 더 연장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 기적을 통해서 미리

 

보여 주신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알아보고

 

믿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됩니다.

 

 

 

3)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 5,2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5).”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8-29).”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지상에서의 수명을 조금 더

 

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지상에서 아주 오래

 

사는 것이 꼭 좋은 일인 것만은 아니고,

 

반대로 일찍 죽는 것이 꼭 불행한 일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지상에서의 수명에 집착할 이유가 없습니다.>

 

 

 

4) 예수님은 희망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심정을 생각하면, 그가 처음에 예수님을

 

찾아올 때에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깊은 절망에

 

빠졌을 것이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라는

 

예수님 말씀에 또다시 막연하게 희망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딸이 다시 살아났을 때에는 예수님이 ‘생명의

 

주님’이시고 ‘희망의 주님’이시라고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 믿음과 희망을 끝까지 간직하면서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했다면, 자신이 나중에 생을 마칠 때,

 

또는 가족 중에 누군가의 죽음을 맞이할 때, 그 믿음과

 

희망 속에서 흔들림 없이 그 일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종합해서, “예수님은 사랑이신 분이고

 

구원이신 분”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그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면서,

 

주님과 함께 사는 행복을 ‘지금’ 누리는 사람이고,

 

또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행복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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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중 제13주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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