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반영억 신부님_일어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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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6-29 | 조회수76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메마른 대지를 적셔주는 비가 내렸습니다. 비로 인한 피해가 없기를 소망하며 우리 마음에는 은총의 비를 충만히 내려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시길 빕니다.
복음을 보면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얻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회당장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사람이고 아쉬울 것이라고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회당장이 타인의 발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여간해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무엇 때문에 엎드렸습니까? 어린 딸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의 내면과 가정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거센 돌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시련 중에 예수님께 엎드렸습니다. 사람이 누구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항복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넘겨준다는 뜻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놓았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 고 한 말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통의 긍정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높은 것을 바라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회당장은 고통을 통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고 자기가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죽어가는 어린 딸을 절망과 분노와 슬픔에서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그는 결코 주님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죽어가는 어린 딸을 살리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엎드려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우리도 말 못 할 고민이나 걱정을 지니고 있다면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청해야 합니다. “저로서는 더는 어떻게 할 수 없기에 이 문제를 당신에게 맡깁니다. 당신의 능력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이 고통과 고민,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당신만이 해결의 열쇠입니다. 도와주십시오.”하고 주님께 모두를 맡겨 드릴 때 거기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 간청하는 와중에 시련이 연속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회당당장이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하는 사이에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하고 말합니다. 절망적인 순간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매달렸고 희망을 두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가능성이 없는 절망의 순간입니다. 인간적인 한계에 접하게 되었는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북돋워 주십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지, 네가 지금까지 지켰던 믿음을 흔들리지 말고 계속해서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선택의 순간이 온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을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냐?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인간이 끝났다고 생각할 때 하느님은 시작하십니다. 인간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은 은총의 때, 구원의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침내 회당장은 “사람들의 말”이라는 유혹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의 능력, 권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련은 은총의 기회입니다. 시련을 통하여 나의 믿음을 바라보게 되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혈액암으로 고통을 받는 한 자매를 만나게 되었는데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늘 맑고 밝은 모습이라서 환자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투병 중에 천일기도를 시작하셨고 물질로도 매일 일정액을 봉헌하였으며 저에게 매주 편지를 쓰셨습니다. 그의 편지 중 하나입니다.
“요즘에는 몸은 아프지만 성부, 성자, 성령님과 성모님을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나의 사랑하는 딸, 테클라야! 내가 너에게 병고를 주는 것은 너를 얼마나 내가 사랑하는지 깨닫게 함이며 또 한 가지는 너의 몸과 마음을 비울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내려놓을 수 있을 때까지 내려놓아라. 그래야 내가 네 안에 자리 잡고 너의 주인이 될 수 있단다. 이제까지는 너의 몸과 마음이 너에 의해서 움직였지만, 지금부터는 이제 내가 너의 주인 이란다.’ 그래서 이제는 저를 비울 수 있을 때까지 많이 많이 비워서, 큰 공간을 하느님이 자리 잡으실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할 거예요, 신부님, 저의 이 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병을 통해서 얻은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성체를 모시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기쁨인가? 두 번째는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닌 하느님이 심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병의 고통을 통해 몸과 마음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니 당신이 알아서 저를 쓰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제게 평화와 기쁨을 줍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답은 한가지! 제 생명을 주신 분도 한 분, 거두어 가실 분도 한 분, 우리 주 하느님뿐이시니 모든 것을 그 분 계획안에 맡기고 따르는 길 뿐임을!”이라고 말씀하시며 고통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며 남모르게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천일을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지만, 임종을 맞기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크게 느꼈고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켰습니다. 주검 앞에서는 울고불고 우왕좌왕 혼란이 있게 마련입니다. 슬픔과 무질서가 지배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집에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었습니다. 슬픔에서도 영원한 생명의 희망이 가득했습니다.
“일어나라.”는 말씀은 “부활하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의 삶을 믿는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살 때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탈리타쿰!”,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에 소녀가 일어나 걸어 다녔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믿고 신뢰하면 이런 기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쫓아다니지만, 기적은 믿음을 지닌 삶의 자리에 있습니다.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드시길 빕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소녀는 육으로뿐 아니라 영으로도 살아났습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라고 한 하느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육적인 음식을 먹던 그는 죽었습니다. 이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51). 신앙인이 먹어야 할 음식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성체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자주 읽고 미사 참례를 더 자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상을 밝히 빛내시길 바랍니다.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천상 것들을 추구하는 신앙인이 되어 기적을 낳고 기적을 전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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