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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수철 신부님_순교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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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7-05 조회수68 추천수7 반대(0) 신고

 

“섬겨라, 희망하라, 견뎌라”

 

오늘 우리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를 봉헌합니다. 2019년까지 대축일로 지내오다 주교회의 2019년 추계정기총회의 결정에 따라 2020년부터 신심미사로 봉헌합니다. 본격적 강론에 앞서 몇가지 일화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엊그제 교황님과 이민자들과 만남을 주선했던 마티아 신부의 두 고백입니다.

 

“교황님은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고 그들이 행하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모든 이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교황님은 그들을 ‘계속 나아가라’(to keep going)고 격려했다.”

교황님의 ‘계속 나아가라(to keep going)’는 특징적 말마디는 좌절함이 없이 줄기차게 계속 살아가라는 격려입니다. 또 하나의 고백도 깊은 묵상감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이민자들을 구출하고 환영했을 때, 우리를 구원한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역경에 처한 이들을 구원함이 바로 자신에게도 구원이 된다는 말마디입니다.

어제 읽은 ‘교부들의 발자취’에서 프랑스 출신의 놀라의 성 파울리누스(355-431) 주교의 말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인간은 먼지요 그림자다.”

“나에게 유일한 예술은 신앙이요, 그리스도는 나의 시(詩)입니다.”

 

오늘 옛 어른이 말씀도 새롭습니다.

“세상은 나에게서 비롯되고, 나는 공부에서 비롯된다. 나를 닦는 공부의 길은 세상을 편안하게 하는 길이다.”<다산>

‘공부하다 죽어라’는 고승의 말도 생각납니다. 공부의 궁극목표는 결국 이웃을 향하고 있음을 봅니다.

“자로가 군자를 묻자 공자가 답했다. ‘자기 몸을 닦아서 공경하는 것이다.’ ‘자기 몸을 닦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일은 요순임금에도 어렵다.’” 

역시 수신의 궁극 목표도 이웃을 향하고 있음을 봅니다.

 

어제의 두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흡사 세월 흐름의 빠르기가 기차를 타고 갈 때 휙휙지나는 풍경 모습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지나고 나면 한 순간 같습니다. 또 하나의 깨달음은 신독과 더불어 떠오른 생각입니다.

“신독(愼獨), ‘홀로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행을 삼간다’는 뜻입니다. 어느 자리에서도 인간의 품위, 존엄, 분별력을 지녀야 비로소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새삼 귀결되는 물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만25세까지의 삶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100여년간 박해로 한반도에서 순교한 신자들이 만여명이 된다 하니 가톨릭 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일 것입니다. 성인의 삶이 요약된 최민순 신부 작사, 이문근 신부 작곡의 성가 287장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는 언제 들어도 감동입니다.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의 ‘삶의 양’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의 ‘삶의 질’이 문제입니다. 참으로 치열했던 성인의 짧은 생애는 보통 사람의 몇배는 산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 젊은 나이에 어쩌면 그리도 의연하고 담담할 수 있는지 우리의 왜소한 믿음이 부끄럽게 생각됩니다. 죽어서만 순교가 아니라 살아서도 순교적 삶이 있습니다. 잘 깊이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모두가 힘든 순교적 삶을 살아갑니다. 순교적 삶을 위한 세 지침을 소개합니다.

 

첫째, “섬겨라!”입니다.

사랑의 섬김, 겸손의 섬김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당신의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합니다. 평생 주님을 배우며 섬기며 살아가는 평생 배움의 여정, 섬김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잘 배우고 섬기는 일은 복음적 삶의 핵심요소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잘 듣는 경청이 우선입니다. 우리의 침묵도 결국은 경청과 섬김, 겸손과 순종을 위함입니다. 오늘 역대기 하권의 요아스 임금과 유다의 대신들은 이점에서 완전 실패했습니다.

 

이들은 주 하느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우상들을 섬겼으며,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아예 무지에 귀가 멀어 듣지 못했고 마침내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 예언자를 죽입니다. 그의 마지막 두 말마디가 긴 여운을 남깁니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둘째, “희망하라!”입니다.

주님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제2독서 바오로의 고백도 믿음과 더불어 희망이 그 중심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선물같은 희망이 우리를 살게하는 힘입니다. 바오로 말씀처럼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받았습니다."(로마8,24). 희망의 하느님, 희망의 여정, 희망의 힘, 희망의 빛입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이 희망의 원천입니다. 사랑의 샘에서 샘솟는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이 희망의 순례자가 되어 구원을 앞당겨 살게 합니다. 희망과 꿈이 실종된 시절, 주님 ‘희망의 표지’로 살아갈 때 이보다 이웃에 좋은 선물도 없습니다.

 

셋째, “견뎌라!”입니다.

끝까지 견뎌내는 인내의 사람이 궁극의 승리자가 됩니다. 정말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인내의 침묵, 인내의 겸손, 인내의 지혜, 인내의 사랑, 인내의 믿음, 인내의 정주, 결국 인내는 모든 것이 됩니다. 이런 인내가 깨어있게 하고 매사 조심하게 합니다. 이런 인내의 믿음이 불안이나 두려움, 걱정도 사라지게 합니다. 

 

새삼 이런 인내심과 인내력 역시 성령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그러니 인내의 선택, 인내의 훈련, 인내의 습관 역시 절실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성규72,4-5) 말씀도 기억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도 인내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참으로 끝까지 견뎌내고 버텨내는 인내의 믿음, 정주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순교적 삶은 결국 신망애(信望愛)의 삶으로 요약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끝까지 견뎌내고 버텨내는 정주의 믿음, 끊임없이 샘솟는 희망의 힘,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섬김의 사랑이 자발적 기쁨으로 한결같이 순교적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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