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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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7-06 | 조회수79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마태 9,14-1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그분의 제자들을 질책하듯 묻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자신들은 단식을 이렇게나 많이 하는 열심한 신앙인들이라는 자부심이, 그리고 그런 자부심으로 자기들보다 열심하지 못한 다른이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교만함이 묻어나는 질문입니다. 자기들이 단식을 해보니 너무 좋아서 다른 이들도 그 좋은 길에 초대하는게 아니라, 우리도 이만큼 하니 너희도 하라는 식으로 일종의 ‘강요’를 하고 있는 셈이지요. 자기들이 하는 단식에서 뜻하던 바를 이루고 만족을 얻었다면, 그 참된 의미와 기쁨을 깨달았다면, 왜 너희들은 안하냐는 식으로 단죄하기보다, 이렇게 좋은 것이 있으니 함께 해보자고 초대했을텐데, 그러질 못하니 억울한 마음에 억지로 강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단식하는 횟수라는 기준을 통해 자기들이 더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고 있음을 드러내 과시하려는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애처로운 모습입니다.
단식은 부족하고 약한 우리 인간이 하느님과 더 깊이 일치하기 위한 종교적 방편입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머무르시도록 나 자신을 비우겠다는 마음가짐을 음식을 끊는 행위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주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 때 그분께로 돌아가기 위해 하는 겁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의심하게 될 때, 그분의 존재와 함께 하심을 자꾸만 망각하게 될 때, 하느님 뜻에 따르는 삶이 의미없고 무가치하다고 여겨질 때, 그런 나로하여금 ‘첫 마음’을 회복하도록 영적인 ‘리셋’버튼을 누르는게 바로 단식인 것이지요.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삶과 행동으로 드러내 보여주시는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에’ 함께 계시는 동안은 단식할 게 아니라, 그분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축제에 참여하여 그 기쁨을 함께 누릴 때 입니다. 사람은 때와 장소를 잘 가려야 한다고 하지요. 남들은 다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과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데, 나만 심각한 표정으로 가슴을 치며 그분의 부재에 대해 묵상한다면 주님께서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시는게 아니라,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안타깝게 바라보실 겁니다.
우리가 단식과 금육이라는 재계를 지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함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고통과 희생을, 내가 절약하고 모은 부분을 이웃과 나누는 자선을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단식을 했는지 안했는지, 금육재를 지켰는지 안지켰는지의 결과에만 연연하며 스스로를 구약의 율법으로 옭아매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세상 종말의 순간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대에 섰을 때 금요일에 고기를 먹었다고 혼날까요? 아니면 기회될 때마다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않은 안일하고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혼날까요? 그 답을 잘 알면서도 금요일에 고기를 먹지 않는데에만 신경쓴다면 내 신앙생활이라는 포도주를 구약의 낡은 율법 안에 가두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세상과 삶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을 하느님 중심으로, 복음 말씀을 기준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새로운 존재로 변화됩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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