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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함부로 누군가를 안다고 단언하면 안 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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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백봉7 쪽지 캡슐 작성일2024-07-06 조회수137 추천수2 반대(0) 신고

 

 

 

 

 

  

 

 

2024년 나해 연중 제14주일

 

 

 

<함부로 누군가를 안다고 단언하면 안 되는 이유>

 

 

 

복음: 마르코 6,1-6

 

 

 


LORENZETTI, Pietro 작, (132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인정받지 못하십니다. 그 이유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30년 동안 안 변한 사람이 몇 달 만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고 한탄하십니다. 

 

 

    사람은 사람을 알 수 있을까요? 미국에서 어떤 판사는 여자 친구를 총으로 쏘려다가 미수에 그친 남자를 가벼운 벌로 풀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다음 날 바로 여자를 살해하였습니다. 이 세상엔 수없이 많은 무죄한 사람들이 죄인으로 심판 받아 죽고 수많은 죄인이 뻔뻔하게도 의인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어떤 실험에서 판사들은 같은 판례를 가지고도 아침과 오후가 판단이 달랐다고 합니다. 판결이 과학적인 것 같지만, 사실 판사들의 기분에 좌지우지 되었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알려주려 목숨까지 바친 이가 있습니다. 바로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이 자신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무조건 계속 물었습니다. 

    한 번은 아버지를 살인죄로 신고하려는 이에게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런 일이 ‘경건’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당신이 쓰는 단어인 경건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신들이 좋아하는 일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만약 내가 사과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그건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에요!’라고 대답하는 게 옳으냐?”라고 되묻습니다. 그건 사과의 본질에 대해 말한 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경건함이라는 뜻이 신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이 쓰는 단어 하나도 의미를 알고 쓰지 못했음을 알게 되고 겸손해집니다. 

 

 

    이런 일로 겸손해지면 좋겠지만, 화를 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당시 아테네를 주름잡던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제자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에게 똑같이 당하는 것이 굴욕스러웠고 자신들은 엄청난 액수의 수업료를 받는데 소크라테스는 무료로 교육하는 게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습니다. 

 

 

    그 무리 중 프로타고라스는 진리는 상대적이다, 고르기아스는 보편적인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이 진리의 주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신이란 뜻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니체가 받아들여 신은 죽었다고 말하고 인간은 자기 힘으로 신처럼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하였듯이, 소크라테스도 죽어야 했습니다. 스스로 깨달아서 초인이 될 수 있는 인간이 신이 아니면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소크라테스를 신을 모독한 자요, 젊은이를 올바르지 못한 길로 빠뜨리는 사람으로 모함하여 사형에 이르게 합니다. 사실 그들이 믿는 신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진화론이 그렇습니다. 진화론자들은 타인을 심판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을 잃지 않기 위해 새로운 창조자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 자신들이 아는 판단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그러한 판단을 받으신 이유는 나자렛 사람들이 실제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창조자는 자기 자신들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말하면 내가 그것을 창조하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만들 수도 있고 고칠 수도 있어야 안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비행기를 아느냐고 물으면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모른다고 합니다. 만들어보라거나 고쳐보라거나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안다고 말하면 무지한 것이고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면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은 부모를 만나면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성령을 받으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때 성령으로 아버지의 사랑 받는 자녀로 인정받으십니다. 

    미국의 락 토마스라는 사람도 처음엔 루저였다가, “나는 핸섬하고 터프한 사람이다.”란 말을 하루에 500번씩 하고 삶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가 가능한 존재가 인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변하려고 하는 이들만이 성령과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안다고 여기는 이들은 그런 것으로 인간이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반면 겸손한 인간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창조자의 진리를 찾을 뿐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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