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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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4-07-07 | 조회수220 | 추천수7 | 반대(0) |
교구사제 모임 중에 교구장님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강론을 하는 것은 보람이지만, 강론을 듣는 것은 기쁨입니다. 교구장님은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늘나라’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하느님의 나라와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이방인을 대상으로 했을 때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썼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대인을 대상으로 했을 대는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썼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극히 제한적인 경우에만 사용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이라는 표현대신 ‘주님’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는 ‘하느님의 나라’ 대신에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방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저는 교구장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하느님의 나라와 하늘나라는 같은 의미라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빛나는 나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에 대한 개념입니다. 미국에 이미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서류상으로 아직 온전히 미국에 거주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서류가 미비한 사람들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지만 취업에 제약이 따르기도 합니다. 서류가 미비한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나갈 수는 있지만 재입국이 거절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시간의 특징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입니다. 구원은 선형적으로 나열되는 시간 경과를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와 아직 오지 않은 하느님 나라 사이의 긴장과 역동 속에 십자가 사건이 놓여 있습니다. 구원은 과거에 박제된 사건일 수 없습니다. 나의 생생한 현실이며 오늘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아직 하느님의 나라를 온전한 마음과 정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속에서 마지막 때를 사는 지금 나는 온전히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교구장님은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제2의 그리스도로 살아가야 하는 사제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가야 하는 사제들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12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인은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이제 그 여인은 하혈이 멈추었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께 대한 간절한 믿음으로 하혈하던 여인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하느님의 나라를 체신현험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전승은 그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에 함께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 드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었던 회당장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리타꿈(일어나라.)’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옮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처럼 주님께 의탁하면 좋겠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자비를 청했던 소경처럼 주님께 자비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들 또한 우리의 도움을 청하는 이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면 좋겠습니다. 밤하늘이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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