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예수님의 그 쌍 칼을 들고서 / 성 보나벤뚜라 주교 학자 기념일(마태 10,34-1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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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7-14 | 조회수102 | 추천수3 | 반대(1)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예수님의 그 쌍 칼을 들고서 / 성 보나벤뚜라 주교 학자 기념일(마태 10,34-11,1)
길 가다가 네거리를 만났을 때 오른쪽 왼쪽 길을 동시에 선택할 수 없다. 넓은 시각에서 하늘 나라를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선택을 요구받는다. 살면서 둘 다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유혹을 받기도. 경우에 따라서는 어느 선에서 양립도 하기도. 둘 다 선택하면 목숨마저는 버리지 않을 수도 있을 터인데. 그렇지만 믿음은 오직 한 길이다. 그러기에 두 가지 중 하나만 선택을 해야 할 경우에는 우선순위를 정해야만 한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기로 결심한 우리는, 다 선택하는 타협을 할 수는 없단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는 아예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이렇게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단다. 그리고 가족들이 서로 갈라서서 서로 원수가 될 것이라나. 이는 가족끼리 싸우라는 게 아닌, 우리를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면 가족이라도 과감히 버리라는 가르침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를 당혹케 하신다. 사랑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근거요 기둥인데, 그분 요구는 너무너무 단호하다. 당신을 따르기로 결심한 이상 그 무엇과도 일체 타협은 없단다. 어느 순간 어정쩡 타협하려고 하늘 나라 요구들을 애써 외면하는 그 한순간, 잠시 귀 막고는 그분 가르침을 열심히 따르자. 그것만이 하늘 나라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사랑은 가장 위대하고 소중하지만, 때로는 그 사랑의 기준이 잘못 되었을 때 우리 삶을 흔드는 장애가 될 게다. 이렇게 부모와 자녀, 그리고 부부 사이를 이어 주는 위대한 사랑의 끈은 우리 삶의 가치를 지켜 주고,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사랑을 잘 지키려고 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정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하느님에게 다가감만이, 결국은 가족 친지와 함께 함이니까. 사실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다만, 자기 가족만을 위하여 예수님을 버리면서까지 진리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마저 죽음에 빠트리는 일이니까. 이러니 가족을 진정 사랑하는 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주님 뜻’에 따라 살도록 이끄는 것임을 두말할 나위가 결코 없을 것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이는 나에게 합당하지 않는다.” 이는 너무나 가혹해 보이는 것 같지만, 너무너무 명확한 우리 신앙의 지침이다. 사실 하느님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와는 모든 면에서 분명 다르다. 힘으로 입을 막고 강제로 하나 되게 하는 것은 거짓 평화다. 이는 평화를 가장한 불의나 다름이 없다. 예수님은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단다. 거짓 평화는 오히려 세상을 분열시킨다. 예수님은 이를 칼로 베어 버리고 당신 평화를 주시려 오셨다. 그분 평화는 힘으로 남을 지배하는 게 아닌, 자신만을 그저 내어 주며 뜨겁게 사랑만 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평화이리라. ‘자, 칼을 받아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라는 것일 게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의 참 평화를 찾을 때까지 거짓 평화와 싸워야만 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칼 주신 이유이다. 따라서 우리는 내 것만 사랑하지 말고 모두를 안고는 이 세상을 두루두루 사랑해야 하리라. 쌍 칼을 들고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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