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신부님_주님의 제자다운 삶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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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7-15 | 조회수121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날마다 내적으로 성숙되어 주님을 닮아가는 삶”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ㄴ)
화답송 후렴이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우리에게 좋은 삶의 지침이 됩니다. 참으로 어른스럽게, 주님의 제자답게 사는 방법을 배웁니다.
“어른스러움이란 세월에 따라 잡히지도, 세월을 거스르려 하지도 않고, 기꺼이 나이다워지는 것이다.”<다산> “나이 쉰에는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고, 예순에는 말을 듣는 법을 터득했고, 일흔에는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논어>
나이 일흔에는 매사 하는 일이 자유로우면서도 죄를 짓는 일이 없었다 하니 그대로 하늘의 뜻과 일치된 공자의 삶이었음을 봅니다. 과연 나이와 더불어 내적으로 성숙되어 주님을 닮아가는 삶인지 뒤돌아 보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도 시공을 초월하여 강렬한 호소력을 지닙니다. 주님의 제자다운 삶에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참으로 귀를 기울여 경청하라 하시며 이사야 예언자는 그대로 하느님의 생각을 전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한 이사야 예언자요 우리 예수님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예언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너희의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도 지쳤다.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나는 들어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정의와 공정, 선행의 삶이 없는 전례의 헛됨을 지적한 말입니다. 전례의 거부가 아니라 전례를 가득 채우는 참 좋은 정의로운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삶이 빠진 전례는 공허하고 헛될 뿐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고스란히 전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그대로 오늘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단호한 말씀입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사회정의의 실천이 얼마나 엄중하고 절박한 하느님의 요구인지 오늘의 부정의한 현실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가까이에서부터 실천되어야 할 정의와 공정, 선행, 약자를 보살피는 자비행의 삶과 함께 가는 전례일 때 하느님도 기꺼이 받아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사명이 너무나 단호하여 충격적입니다. 그대로 예언자의 계보를 잇고 있는 예수님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가짜 평화, 거짓 평화입니다. “거짓 평화를 주지 마라”(성규4,25)는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정의의 칼’, ‘진리의 칼’앞에 저절로 불의와 거짓이 탄로되는 분열이지만 잠정적인, 참평화에 이르는 창조적, 과정적 분열일 뿐입니다. 새삼 값싼 평화는 없음을, 참평화와 일치에 이르는 인내와 노력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역시 값싼 은총도 값싼 평화도 없듯이 값싼 제자직도 없음을 다음 예수님 말씀이 웅변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참으로 사는 길은, 참으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사는 길은, 주님 때문에 죽어서 사는 길은 주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죽을 때까지 제 운명의 십자가, 제 책임의 십자가를 지고 항구히 주님을 따르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값싼 제자직의 삶은 없습니다. 제자다운 삶임은 물론 참사람의 길입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제자들에게 강조하는바 ‘그 무엇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마라’는 것입니다. 일편단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이어지는 환대의 사랑, 환대의 신비도 깊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여기서 너희는 우리 제자들을 물론 더 넓게 보면 인류가족에게 해당된다 생각됩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 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을 하느님을 배경에 두고 있는 제자들이자 형제들이요 이들을 환대함은 바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 하나하나가 주님을 배경한 참 고귀한 품위의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환대할 때 보상이 따를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자녀답게 스스로 이웃을 환대하며 품위있게, 어른스럽게 살아감이 얼마나 주님의 제자다운 삶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가톨릭 교회의 성인들이고 오늘 기념하는 성 보나벤투라입니다. 13세기 도미니코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쌍벽을 이뤘던 프란치스코회의 성 보나벤투라는 경건과 사랑이 흐르는 면에서 “세라핌적 박사(The Seraphic Doctor)”라 불렸고, <성 프란치스코의 대전기>를 비롯한 수많은 저서를 남깁니다. 보나벤투라 이름에 담긴 사연을 들으면 성 프란치스코와의 섭리적 인연임을 깨닫게 됩니다. 프란치스코가 앓고 있는 보나벤투라를 보자 “잘 왔노라(bona ventura)”라고 말했기 때문이란 전설도 있고, 그가 병이 나았다는 전언을 듣고 “좋은 소식이로다(bona ventura)”라고 말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성인은 파리대학교에서 교수로서 오래 재직할 수 없었음은 그가 40대 초반 프란치스코회 제7대 총장으로 뽑혔기 때문입니다. 위기상황에서 총장직에 오른 그는 엄청난 책임감과 그에 따른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쉼없이 활동합니다. 그는 36개의 분파로 나뉠 정도로 심각했던 프라치스코회의 내적갈등의 완화라는 결실을 이룸으로 프란치스코회의 제2창설자로 일컬어 집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그의 지혜와 성덕을 흠모하여 1273년 3월23일 추기경으로 임명했고 임명장을 들고 왔던 교황 사자는 부엌에서 식기를 씻고 있던 성인을 만납니다. 추기경이 된 성인은 리용 공의회 참석중 교황과 동서교회의 다수의 고위 성직자들이 임석한 가운데 병환으로 선종하니 진인사대천명후의 거룩한 죽음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53세로 선종하기 까지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여 교회와 수도회에 충성을 다했던 성 보나벤투라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며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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