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6 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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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4-07-20 | 조회수269 | 추천수1 | 반대(0) |
2002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역사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입니다. 어느덧 22년이 지났습니다. 한국은 폴란드와 포르투갈을 이기고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올랐습니다. 기세를 몰아 한국은 이탈리아를 연장까지 가는 혈투 끝에 2:1로 이기고 8강으로 올랐습니다. 감독인, 히딩크는 ‘I am still hungry!’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한국은 스페인과 승부차기 끝에 4강으로 올랐습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용광로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붉은 악마’가 되었고, 붉은 셔츠를 입었습니다. 당시에 모든 사람이 힘차게 외쳤던 구호와 박수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구호와 “짝짝 짜자작”으로 이어지는 박수였습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구호가 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구호입니다. 어린 시절 저의 기억에 깊이 새겨졌던 구호가 있습니다.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 불’이라는 구호입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모두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학교 담벼락에도, 동네의 담벼락에도 ‘국민소득 1,000불과 수출 100억 불’이라는 구호가 신동우 화백의 그림과 함께 그려졌습니다. 당시 정부는 1980년대에 그 목표를 이루겠다고 했는데 빨리빨리의 대한민국은 4년 앞당긴 1977년에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2023년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33,475달러입니다. 수출은 1,118억 달러입니다. 소득은 33배가 넘게 증가했고, 수출은 11배가 넘게 증가했습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구호가 있습니다.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입니다. 구호는 목표가 되었고, 목표는 우리에게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한국교회에도 구호가 있었습니다. 1984년 한국교회는 창립 2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한국교회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주례로 103위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200주년 준비의 하나로 ‘사목회의’를 개최했습니다. 103위 시성식을 기점으로 한국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10년마다 신자 수가 100만 명씩 증가했습니다. 1980년대에 100만 명이던 신자는 2020년에는 500만 명을 넘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가 늘어났습니다. 본당은 넘쳐나는 신자로 분가해야 했습니다. 서울과 광주에만 있던 신학교도 늘어나는 신학생을 다 받지 못해서 늘어났습니다. 수원, 인천, 대전, 부산, 대구에 새롭게 신학교가 생겼습니다. 한국교회가 창립 200주년을 준비하면서 내세운 구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빛을‘이라는 구호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의 도움 없이 하느님을 받아들였던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많은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이 땅에 하느님 사랑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하느님 사랑의 빛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1989년에 한국교회는 44차 ‘성체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03위 시성식은 우리만의 행사였다면 성체대회는 가톨릭교회의 공적인 행사입니다. 변방에 있던 한국교회는 성체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당당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신학생이었던 저는 ‘괌’에서 온 순례단의 안내를 맡았습니다. 브라질의 주교님이고, 세계적인 해방 신학자인 ‘돔 헬더 까마라’ 주교님의 강의를 직접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교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가난한 사람을 돕자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성자(聖者)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내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조직을 만들자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도 좋지만,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주는 것은 더 좋은 것입니다. 44차 세계 성체대회의 구호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영적으로 충만한 신앙은 ‘공감’에서 시작됩니다. 공감은 연민이 되고, 연민은 조건 없는 나눔이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공감과 연민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공감과 연민이 희생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공감과 연민이 함께 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더는 슬픔과 울부짖음이 없는 세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재물과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한없는 연민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영적으로 충만한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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