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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마태오 13, 24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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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7-26 조회수51 추천수2 반대(0) 신고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13,29~30)

예수님의 선포와 실천의 핵심은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 곧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에 있습니다. 이런 연유에서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하느님의 다스림과 그 나라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에 관한 가장 중요한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13,1~23)와 가라지의 비유(13,24~30)입니다. 이 두 가지 비유를 깊이 살펴보면 우리가 우리 시대의 악에 관해 어떤 처신을 해왔고, 해야 하는 가를 반면교사로 배울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 점은 선한 의도와 관계없이 선의 좌절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가 제자들과 확연히 구별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선행에 실패가 불가피함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당혹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해서 꿋꿋이 자신이 해야 할 바(=하늘나라의 선포)를 실천해 가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리지 비유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삶과 의도와는 달리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단호히 선으로 악을 대처하는 대신 자기를 악에서 분리하려는 의도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밭에 좋은 씨(13,27)를 뿌린 주인이십니다. 밭에 뿌려진 좋은 씨인 밀은 선이며 선포해야 할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밭에 가라지는 덧뿌려진 악이며 배격해야 할 악의 가치인데 예수님은 그것을 뿌린 그 실체를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13,28)하고 지적하신 것은 이미 그 악의 실체를 인지하고 직시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분명 하느님의 뜻과 부합하고 적합하지 않은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밀과 가라지가 한 밭에 공존하듯이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진솔한 세상, 교회, 가정, 개인의 현실이며, 이러한 현실 상황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행동을 깊이 숙고해야 합니다. 제자들처럼 그리스도인인 우리 역시 이런 현실 앞에서 당황스럽고 혼란을 겪을 수도 있으며 즉각, 가라지(=악)을 보고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13,28)라고 대응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하려 합니다. 그런데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기에 잠시라도 직시하고 직면하면서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는 단지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런 졸속한 해결책에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13,29.30)하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농사법은 세상의 농사법과 다름을 보여줍니다. 이런 성급함은 오히려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더 힘든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시선이 아닌 하느님의 시선, 신앙의 시선에서보다 신중히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 버려 두어라.”(13,30)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 먼저 악을 우리 가운데 두고 견디어 내자, 는 것입니다. 듣기에 따라서 예수님의 처신이 엄청 소극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방안처럼 들릴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왜 예수님은 이런 방안을 제자들에게 제시하셨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상의 어떤 누구도 시초에는 밀과 가라지를, 선과 악을 분명하게 알아볼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도 그리고 지금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목 현장에서 가리지(=악)를 뽑으려다 밀(=선)까지 뽑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반복되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밀과 가라지는 모양이 거의 비슷해서 자칫 가라지를 뽑으려다 보면 밀까지 뽑아버릴 수가 있으며(13,29참조),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밀과 가라지가 뿌리로부터 서로 얽혀 있어서 가라지를 뽑아내려다 오히려 밀까지 뽑아낼 십상입니다. 그래서 이를 아시는 예수님은 밀과 가라지를 그냥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고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확실히 초대 그리스도교인은 악, 개인이나, 집단을 자신들과 구분하고 구별 지으려고 했고, 함께 살기보다 배격하고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배경에는 자신들의 약한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종교의 엘리트 의식, 선민의식,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관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태도는 무엇보다 먼저, 일단 타인에게 악의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악의 실체를 인지하면서도 꿋꿋이 선을 실행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음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선 하나만이 악에 대처하는 진정한 해결책이 됩니다. 악을 악으로,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다 보면, 끊임없는 악순환만이 반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율법이 인간의 구원을 제약하는 곳이 어디든지 율법을 반박하였고, 오로지 하느님의 선으로만 하늘나라를 현실화하려고 묵묵히, 꿋꿋이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고 거부하기보다 현실 상황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실천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아갑시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13,30)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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