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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7주일 나해, 조부모와 노인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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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4-07-28 조회수61 추천수6 반대(0) 신고

[연중 제17주일 나해, 조부모와 노인의 날] 요한 6,1-15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겉보기에 불가능해 보이거나 매우 어려운 일에 도전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 때문에 변화되기도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폭력을 사랑으로 되갚는 이들 때문에 세상에 평화가 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이기심을 선의와 자비로 뒤덮는 이들 때문에 세상이 따뜻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그분께서 ‘주님’이심을 믿게 된 제자들도 스승님이 먼저 시작하신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기꺼이 동참하였습니다. 세상에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 모진 박해와 죽음이 기다리는 세상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었습니다. 그 수많은 계란들 덕분에 이 땅 위에 교회가,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성공이라는 카펫이 깔린 꽃길을 마다하고 기꺼이 가시밭길을 걸으려는 수많은 계란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과 제자들을 그런 계란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빵의 기적, 사랑의 표징을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주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수많은 군중들을 가엾이 여기십니다. 오늘날 우리 상황으로 비유하면 추석 명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당신을 따라다니느라 그 충만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배까지 곯아가며 고생하는 이들을 안쓰럽게 여기신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아무도 걱정하지 않으며, 모두 함께 배불리 먹는 기쁨을 누리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일으키실 그 기적이 그저 놀라운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는 ‘표징’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먼저 당신 제자 필립보에게 물으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스승님께서 군중들의 배고픔과 고생을 당신 일처럼 여기며 안쓰러워 하신 것처럼, 이웃의 배고픔과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며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한편 예수님께서 그 질문을 하신 또 다른 의도는 우리가 빵을 구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참된 빵은 세상에서 돈을 주고 사는게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선사해주시는 것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렇게 물으신 것이지요. 또한 그 질문 안에는 당신 자신을 우리를 먹여 살리는 ‘생명의 빵’으로 내어주시려는 예수님의 사랑이 ‘표징’이자 ‘암시’처럼 숨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를 먹여살리시고 보살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려는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지 않고, 철저히 이성과 합리라는 세상의 논리에 따라 숫자라는 물질적인 기준으로 계산한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천만원이라는 큰 금액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는데도 그저 한 없이 모자랄 뿐입니다. 사람들이 만족스럽게 배를 채우기는 커녕 겨우 허기를 면할 정도로 만드는데도 수 천만원이 깨지는 상황이니, 그들을 제대로 먹이려면 대체 얼마가 필요할 지 선뜻 계산이 되질 않습니다. 그런 거액을 자기들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핑계로 그런 자기 모습을 합리화하려 합니다. ‘어차피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그냥 내버려 둡시다’. 자선과 나눔을 주저하며 나중으로 미루는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유가 없어서 못나눈게 아니라 베풀 마음이 없어서 못나누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점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본격적으로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일단 사람들이 당신 곁에 자리를 잡고 앉게 하십니다. ‘어차피 안된다’는 실망감에 좌절하여 뿔뿔이 흩어져 떠나가지 않고 굳센 믿음으로 당신 곁에 단단히 자리를 잡게 하시는 것이지요. 부족하고 약한 인간의 논리로 계산기를 두드려봐야 늘어나는 것은 걱정과 한숨 뿐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럴 땐 복잡한 생각이나 계산은 다 접어두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에서조차 당신의 섭리와 계획 안에서 반드시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 하나만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선택이지요. 내가 그런 믿음으로 주님 곁에 자리를 잡으면 바로 그곳이 기적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내가 순명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바로 그 실천이 놀라운 기적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인간적인 계산에 너무 밝아서 주님의 뜻을 몰라보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리지만,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항상 부족함을 느끼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을 믿으면 ‘주님,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제 전부를 드렸으니 부족한 부분은 당신 사랑으로 채워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은총과 축복을 차고 넘치도록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믿음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께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보리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인간의 관점에서는 수 천명의 군중이 먹기에 터무니 없이 모자란 양이었지만, 걱정하시기 보다 먼저 감사의 기도를 바치시며 부족함을 하느님 손에 맡기셨습니다. 나누고 베푸는 아버지의 선한 뜻을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실행하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는 시편의 내용처럼 하느님께서 몸소 이스라엘 백성을 배불리 먹이신 것이지요.

 

사람들이 얼마 안되는 음식을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 두 광주리가 가득찼다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이 너무도 풍부해서 우리의 인간적인 필요와 부족함을 충만히 채우고도 남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다만 그런 충만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듯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지니고, 기꺼이 그분 뜻을 따르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으로 내 것을 지키겠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내 삶에는 아무런 기적도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외로움과 고독으로 바짝 말라비틀어지고 말겠지요. 그러나 감사와 순명으로 먼저 주님 뜻을 실천하면 그 실천이 은총의 마중물이 되어 내 안에서 기쁨과 행복이 펑펑 솟아나게 만들어 줄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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