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는 어디에서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13,57)
누구에게나 고향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그리움과 아쉬움이 함께 교차하리라 봅니다. 아버지 장례 미사를 드린 후 20년이 넘어 제 출신 본당인 순천 저전동 성당에서 사순절 특강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픈 과거의 기억과 함께 지난 세월이 한순간처럼 다가왔습니다. 미사와 특강 후 제 부모님을 기억하고 계신 몇 분의 신자 분들을 만났을 때, 아름답고 선한 기억을 잊지 않고 들려주어서 조금은 위로와 치유를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고향에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익명성이 통하지 않습니다. 워낙 좁은 곳이고 인구가 그다지 많지 않기에 말입니다. 이 점은 예수님 시대에도 동일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 앞에 떳떳하셨지만, 고향 사람들은 현재의 예수님보다는 과거 자신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기억과 고정화된 기억의 틀 안에서 누구의 아들, 누구의 형제자매라는 범주에서 예수님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향 사람들의 고향 사람에 대한 인식과 수용의 한계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남 잘 나가는 것, 남 잘된 것을 보고 싶지 않고 인정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숨은 일도 보시는”(마태6,4.6.)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고향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13,54)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랍니다. 여기서 말한 지혜란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을 의미합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이란 바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상황을 잘 판단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먼저하고 나중에 해야 하는지,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사리 판단력을 갖춘 사람을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세상적인 지혜를 갖추고 계신 분이셨고, 사실은 바로 지혜 자체인 분이셨지요. “모든 지혜는 주님께로부터 오며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다.”(집1,1~10)하고 집회서는 강조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13,56~57)하고 예수님을 대하는 고향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고향 사람들만의 반응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은 타인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어떤 누군가가 옳지 못한 모습을 보였을 때,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고향 사람들의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그 밑바탕에는 내재된 타인에 대한 고정관념, 선입견과 편견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어제와 달리 변화되었거나 성장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과거의 낡은 틀 속에서 상대방을 보고서 거부하고 부정하려고 합니다. 이보다 더 깊은 거부 반응의 다른 요인은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에서 기인한 치명적인 거부 행위입니다. 이는 타인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 어둠과 상처를 인정하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부정이며 자신에 대한 거부 행위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보다 더 슬프고 안타까운 일은 없으며, 이런 고향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꿰뚫어 보셨기에 안타까워하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13,58)하고 오늘 복음은 표현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적의 시작은 닫힌 마음을 여는 것으로 시작하며, 기적으로 말미암아 어제의 그 상처받고 어둠으로 짓눌린 세월의 무게에서 내적 자유를 체험하고, 무지에서 참된 하느님의 지혜로 세상을 슬기롭게 행복하게 살며, 하느님 안에서 생명을 얻고 더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13,57)라는 말씀을 던지시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고향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던 것입니다.”(13,58) 그 어디에서보다 고향에서 먼저, 그 누구에게 보다 고향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하늘나라를 함께 공유하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함께 실현하고자 했지만, 끝내 거부와 배척을 받으시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마음을 저는 알 것 같습니다. 혹여 우리도 우리 자신의 편견과 열등감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시려는 믿음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고 끝내는 하루가 되지 않길 바랍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1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