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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수철 신부님_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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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8-02 조회수121 추천수8 반대(0) 신고

 

“모두가 지나간다!”

 

 

오늘도 이런저런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내일이면 토요일, 머리 삭발하는 날입니다. 2주마다 깎는데 2주가 순간입니다. 아주 오래전 36년전 수도원 초창기 두분 스님을 모시고 선禪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저는 보름마다 머리 깎는 재미로 살아 갑니다.” 

 

바로 저의 심정이 그러합니다. 저 역시 2주마다 머리깎는 재미로 삽니다. 마치 ‘2주’ 단위로 사는 것 같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루하루 ‘하루’ 단위로 삽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에 공동체 형제들의 내외적 움직임도 다 다르고 눈부십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사는 수도자들도 모이면 어디나 분잡한 세속이 됩니다. 그래서 어제 게시판에 ‘8월 제 삶의 모토’를 써서 붙여 놨습니다.

 

“모두가 지나간다!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려, 

 흔들림 없이 한결같이 현재의 삶에 충실하자.”

 

당나라 임제 선사의 말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入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지금 있는 그곳이 진리의 자리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은 이들로 말하면 오늘 지금 여기가 깨어 살아야 할, 주님을 만나야 할, ‘하늘 나라 꽃자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감동적인 형제의 일화도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한국의 60대 중반의 가장처럼 가장 힘든 위치에 있는 분들중의 한분입니다. 자신의 노부모와 처가댁 노부모를 돌봐야 했으며 자식들도 챙겨야 했고 대학교수 은퇴후에도 아들과 함께 카페 개장을 앞두고 있는 형제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무려 20여년 이상을 알콜 중독을 극복하고자 분투의 노력을 다했고 교수생활중에도 막중한 책임을 다했던 분으로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고백성사를 보는 데 만난지 16년쯤 됩니다. 

 

공학박사로 대학교수 은퇴후, 작은 아들의 자립적 삶을 위해, 또 아버지 노릇 못다한 미안함에 빵굽는 학원에 다니며 빵굽기를 배웠고, 마침내 아들과 함께 개장될 가게에서 아들은 커피를 만드는 사장, 아버지는 빵굽는 직원이 되어 일하게 되었다 합니다. 매사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겸손하고 진실한 형제님의 삶에 감동합니다. 

 

어제 개장을 앞두고 봉헌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만든 빵을 가져 왔는데, 미사를 봉헌할 때 부부의 모습은 흡사 청년들처럼 신선했습니다. 제2의 인생을, 청춘을, 전성기를 살게 되었다며, 이제 공학박사에서 생활박사가 되었다며 격찬했습니다. ‘데이르’(DAYRE), ‘오늘은 왕’이라는 가게 이름도 멋졌습니다. 날마다 하느님 중심에 뿌리 내린 왕다운 삶은 얼마나 멋진지요!

 

요즘 피어나기 시작한 꽃들의 꽃말도 마음에 남습니다. 마가렛꽃은 ‘진실한 사랑’이요, 상사화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합니다. 꽃이 지면 잎이 나기에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함을 이렇게 꽃말에 담은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 이룰 수 없는 사랑, 어느 경우든 다 지납니다.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내리고 흔들림없이 살아가는 것이 답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한곁같은 삶을 위해 기도, 노동, 공부가 조화된 삶에 운동 역시 필수입니다. 걷기 운동이 좋고 이에 탁구도 권합니다. 어제 파리 올림픽에서 탁구 여자 단식 신유빈 4강 진출에 앞서 경기를 잠시 봤고 얼마전 읽은 ‘탁구는 감각의 대화이다’라는 칼럼이 생각났습니다. 

 

필자는 탁구의 잇점을 “1.몰입할 수 있다, 2.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다, 3.많이 때림으로 스트레스 풀기에 제일이다, 4.최고의 다이어트 운동이다, 5.날씨에 제약없이 언제든지 쾌적하게 즐길수 있다.”로 꼽았습니다. 조화롭고 균형잡힌 영성생활에도 좋은 도움이 되고 심신을 동시에 연마할 수 있는 ‘감각의 대화’인 탁구는 얼마나 유익하고 멋진 운동인지요.

 

바로 ‘모두가 지나가는 상황에서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려 흔들림없이 살아 간’, 또 ‘수처작주 입처개진’의 삶의 대가, 삶의 달인이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의 예레미야입니다. 두분이 흡사 대칭을 이루듯 서로 닮았습니다. 늘 독서와 복음이 대칭을 이루는 구성입니다. 미사중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도 대칭 구조입니다. 얼마전 읽은 ‘대칭의 물리학’을 나눕니다.

 

“자연계의 형태를 지배하는 궁극의 규칙이다. 우리 주위에는 ‘대칭’인 것이 많다. 동식물의 형태와 패션, 건축 디자인등이다. 대칭은 사람에게 일종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지만, 실은 수학이나 물리학등 다양한 자연 과학 분야에도 대칭성은 얼굴을 내민다. 그뿐만 아니라 자연계와 우주의 형태를 결정하는 기본 규칙이 바로 대칭성이다.”

 

예수님과 예레미야의 대칭을 통해서 더욱 말씀을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두분 다 고립무원의 외롭고 고독한 처지였고 주변의 질시를 받고 배척을 받았던 참된 예언자였습니다. 참된 예언자들의 숙명입니다. 두분 모두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린 삶이었기에 지나가는 일들에 흔들림이 없었고 참으로 초연했고 자유로웠음을 봅니다. 

 

예언자들은 물론 예레미아를 통한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가차없이 몰아댑니다. 더불어 오늘날 언론이 예레미야처럼 과연 참된 예언자 역할에 충실한지 살펴보게 됩니다. 가짜 예언자들처럼 나라가 망하든 말든 달콤한 예언을 했다면 이런 박해도 없었을 것입니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집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

 

무지에 눈 먼 온 백성이 일치하여 주님의 집에 있는 참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몰려드니 유다가 망할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무지에 눈멀기로 하면 예수님 고향 사람들도 막상막하입니다. 

 

선입견에 질투에 눈먼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하며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이런 선입견, 질투에서 자유로울 지혜로운자 몇이나 될런지요. 그대로 우리 인간의 근본적 한계를, 부정적 보편적 정서를 보여줍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사건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통찰한, 깨달은 ‘하느님의 지혜’라 일컫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초연하고 자유로울 수 있음은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삶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믿지 않음으로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지만 주님은 좌절하기 보다는 겸손히 공부와 배움의 기회로, 도약의 기회로 삼으셨을 것이며 묵묵히, 한결같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진리의 길을 걸으셨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내리게 하시고, 주위 상황에 집착함이 없이 현실에 충실하며 초연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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