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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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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4-08-02 조회수211 추천수4 반대(0)

억울(抑鬱)’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시기와 질투로 누명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힘이 없어서 강한 사람에게 아무 말 못 하고 가진 것을 빼앗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억울한 상황은 주로 외부에서 주어집니다. 성서에서도 억울한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카인에게 돌에 맞아 죽어야 했던 아벨은 억울할 겁니다. 아합왕에게 포도원을 빼앗기고 죽어야 했던 나봇도 억울할 겁니다. 왕에게 충성했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고 죽어야 했던 우리야도 억울할 겁니다. 우리 시대에도 억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했던 박종철 열사도 억울할 겁니다.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야 했던 사람도 억울할 겁니다. 외압에 굴하지 않고 수사자료를 경찰에 넘겼지만, 항명죄로 1년이 넘게 재판을 받아야 하는 수사단장도 억울할 겁니다. 살로메의 춤판에 희생되어서 죽어야 했던 세례자 요한도 억울할 겁니다.

 

이렇게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씻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이렇게 억울한 이들의 아픔을 알아주시는 분이 있으니 바로 예수님입니다. 사랑하는 제자의 배반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했던 예수님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누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버린다면 억울함은 해소되지 않을 겁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을 통해서 또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기에 억울함은 영원한 생명으로 되살아 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부자는 평생 떵떵거리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죽어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부자의 집 문간에서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은 하느님의 공정과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두 가지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은 허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대면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동굴 속에서 보이는 희미한 빛은 진리가 보여주는 여명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동굴 밖에는 놀라운 세상이 펼쳐지듯이, 우리의 삶은 진리를 향한 여정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기에 시련과 아픔, 좌절과 고통은 이겨낼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신화, 종교, 철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분명한 법칙과 질서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소리, 영적인 세상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수학, 과학, 경제는 이런 사고의 틀에서 발전하였습니다. 세상은 특정한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원자들은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법칙과 질서를 알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인간 중심의 세상이고, 인간이 만든 자본주의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이 보입니다. 수치화된 디지털의 세상에서는 인격과 도덕, 사랑과 우정이 자리할 틈이 별로 없습니다. 이윤의 창출 앞에는 환경의 파괴도, 전쟁도, 폭력도 용인되는 상황입니다.

 

공자께서는 성숙한 인간의 나이테를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지학, 이립,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의 나이테를 말하였습니다. 학문을 배우고, 뜻을 세우고, 의혹이 없으며, 하늘의 뜻을 따르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 어떤 일을 해도 그르침이 없는 삶입니다. 제 나이가 60이 되었는데, 아직은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유혹이라는 바람 앞에 늘 흔들리고 있습니다. 권력을 가졌지만,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헤로데는 하늘의 뜻을 몰랐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세례자 요한을 죽게 하였습니다.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지만, 세례자 요한은 하늘의 뜻을 알았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나이테를 남겨 주었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삶에로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치 여명의 눈동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살려준 사판의 아들 아하킴처럼 우리들도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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