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물도 밥도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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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8-04 | 조회수48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 6,26-27).”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1) 여기서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표징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이 표징인 줄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기적의 빵’을 먹었으면서도 그것이 표징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빵을 배불리 먹었다는 생각만
하면서 나를 찾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나의 신원을 보증해 주셨다.” 라는
뜻이고, 이 말씀은 당신이 메시아라고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빵의 기적’은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한 기적만은
아니고,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신(계시하신)
표징이었는데, 사람들은 배불리 먹은 것만 생각하느라고,
그 일이 표징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나를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2)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앞의 4장의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의 대화가 연상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 4,9)”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요한 4,11)”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배가 고플 때 밥을 찾고, 목이 마를 때 물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생존하려면 물도 마셔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인생이란 먹고 마시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먹고 마시는 것 이상의 무엇’이 더 있습니다.
이야기 속의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요한 4,18) 여자였습니다.
그 상황이 실제 상황일 수도 있고, 여자의 인생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어떻든 그 여자는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갈증과 허기 때문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마실 물을 청하신 것은 단순히
‘몸의 갈증’ 때문이었지만,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인생의 갈증과 허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하느님의 생명수’였습니다.
<복음서에는 그 여자의 뒷이야기가 없는데, 아마도 분명히
그 여자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었을 것이고, 예수님
덕분에 인생의 갈증과 허기에서 해방되었을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배불리 먹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그치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허망하게 끝날 것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과 생명수’를 받아먹고 마시면서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3) ‘기적의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일과(요한 6,15) 예수님을
애타게 찾아다닌 일은, 비록 ‘믿음의 방향’이 잘못되긴
했지만,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대부분 정말로 먹고살기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즉 날마다 힘들게 겨우겨우 살아가는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무슨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실제로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예수님을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폄하하는 것은
부당하고 불공평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진짜로 배고픔의 고통을 안 겪어본 사람들이,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또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잘 모르면서 함부로 비판할 때가 많습니다.>
바오로 사도를 사도로 인정하면서 사도단이 특별히 바오로
사도에게 당부한 것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갈라 2,9-10).”
지금 굶주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우선 당장 먹을 것부터
주는 것이 옳습니다.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그 다음이고...
언제나 항상 ‘사랑’이 먼저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18주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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