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양식,
필요한 양식,
이 둘 가운데 어떤 것이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야 할까?
풀어서 얘기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먹어야 할까?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다 청해서 먹어야 할까?
오늘 탈출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만나를 줄 터이니 일용할 양식만 거두라는 말씀입니다.
만나란 하느님께서 주시는 양식입니다.
거두는 수고를 인간이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수고를 한다 한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그 수고가 헛되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베드로가 고기잡이할 때의 그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래아 최고의 어부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과 만나는 그날처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적은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그때까지 자기가 고기를 잘 잡아서 고기를 많이 잡고,
자기가 애를 많이 썼기에 많이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을 겁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힘이 있지요.
능력과 노력이 그것인데 신앙이 없는 인간은 보통 자기에게 능력이 있고
거기에 노력까지 다하면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베드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만은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는데
예수께서 하라는 대로 하니 많이 잡게 되었고,
이때 그는 예수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주님임을 깨닫고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하느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기를 써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믿게 됩니다.
만나에 담긴 또 다른 뜻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만큼만,
달리 말하면 정해주신 대로 거두어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필요한 만큼 청하는 것을 불허하시는 것일까요?
프란치스코는 가난에 관해 얘기하면서 필요가 곧 법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 필요해서 청하는 것과 욕심으로 청하는 것은 다르다고 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신다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는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청합니까?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조금 필요한데도 많이 필요하다고 필요에 거품이 없습니까?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다시 말해 하루 필요한 만큼이 아니라
천년을 써도 다 쓸 수 없을 만큼 욕심부림으로써
결국 필요가 아니라 욕심으로 청하지는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내게 더 필요하다 하진 않습니까?
일용할 양식으로는 불안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미래를 위해 많이 쟁여두지는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