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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순명과 봉헌의 신비/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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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8-05 조회수55 추천수2 반대(0) 신고

 

■요한 6,1-15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사람들은 반드시 치유를 받아야만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맞습니까? 그 치유를 받을 때 어떤 대상에게 받느냐? 다양하게 받죠.

물론 모든 치유의 근원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를 통해서 치유시키시죠.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서도 치유시키실 때도 있고, 좋은 책을 통해서도 치유시키실 때가 있고,

때로는 사제의 강론을 통해서도 치유시키실 때가 있고, 때로는 안수를 통해서도 치유시키실 때가 있습니다.

아무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치유시키려고 정말 무던히 애를 쓰십니다.

물론 어떤 때는 여러분이 기르는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통해서도 평화를 얻고 안정감을 얻고 치유받을 수도 있어요.

여러분, 혹시 반려견한테 상처받으신 적 있으세요? 없죠. 오히려 사람이 상처 주겠죠.

제대로 먹이지 않고, 함부로 대하고. 말 못 하는 짐승이라고 이해하려 애쓰지 않고.

그래서 반려견 반려묘도 되게 상처들이 많대요.

 

얼마 전 7월 20일 세상을 떠난 20년 길렀던 루비, 루비 묘, 루비 집이 어제 완성됐습니다.

저도 사실 반려견만이 아니라 반려견도 수십 마리 길렀죠.

오죽하면 교구에서 내 별명이 개 신부였어요.

그래서 개에 대한 모든 건 나한테 다 질문을 했어요.

어떤 개가 좋으냐, 하다못해 아플 땐 어떻게 해야 하냐 하는 것도.

그리고 정말 유명한 개들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전국대회 나가서 금상 받는 이런 개들.

배티에 내가 마지막에 땅에 묻었던 아이가 그림 같은 아이죠.

콜리라고 양치는 개였는데, 그 아이는 한 1년 정도 됐을 때 TV 드라마에도 출연했었어요.

베토벤 바이러스에 김영민 개로 나왔었죠.

그 정도로 유명한 개들을 많이 길렀었습니다.

정말 그 아이들한테 많은 위로 받았고, 같이 있을 때는 머리 굴리지 않아도 되어 편했어요.

사람들이랑 얘기할 때는 내가 머리를 계속 굴려야 해요.

이 사람을 어떻게 도와줘야 할까, 원하는 게 뭘까, 지금 왜 나를 찾아왔을까?

그래서 한 30~40분 얘기하다 보면 진이 다 빠져요.

그런데 내가 기르는 아이들이랑은 그냥 편안하게 있으면 되지요.

큰 개들도 많이 길렀고 작은 개들도 많이 길렀는데, 마지막으로 배티에서 칼이라고 하는

아까 드라마에 나왔던 걔가 림프암으로 죽은 후 더 이상 개는 안 기르겠다고 다짐했죠.

생로병사를 지켜보는 게 너무 힘들고 후유증이 너무 오래가요.

그런데 그때 당시에도 며칠 전에 죽은 루비도 내가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얘 하나만 잘 천당 보내고 그다음부터는 고양이도 안 기르겠다고 생각했죠.

개나 고양이가 싫어서가 아니라 헤어지는 게 힘든 거죠.

 

저 루비는 2005년 1월 1일 사제관 앞에 손바닥만 한 게 거의 죽어 있었어요.

그때 사제관까지 찾아왔죠.

딱 손바닥만 했는데 간신히 살려서 키웠죠.

저는 루비를 보면서 하느님이 나를 치유시키기 위해 특별히 보낸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이 들었던 이유가 제가 7살 때 고양이를 죽였어요. 정확히 나 때문에 죽은 거예요.

옛날에 엄마한테 말 안 들으면 회초리로 많이 맞았죠.

그런데 나는 고집이 세서 엄마에게 잘못했다는 얘기를 안 해요.

엄마가 뚜껑이 열려 빗자루로 종아리를 치는 걸 내가 쫓아다니던 고양이를 잡아서 막은 거야.

나 대신에 고양이가 배를 맞아서 그냥 쫙 뻗어버리고 즉사했어요.

나 대신 맞은 거예요. 아마 내가 맞았으면 뼈가 부러졌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아이를 땅에다 묻고 한 두 달 동안을 찾아갔던 것 같아요.

그다음부터는 고양이가 무서웠어요. 커서도 무서운 거예요.

고양이가 좋으면서도 일곱 살 때 나 때문에 죽었던 고양이가 생각이 났죠.

그런데 놀랍게도 루비가 그 죽은 애랑 똑같이 생겼어.

죽은 아이도 에메랄드 눈빛이었어요. 그리고 등이 고등어 색깔이었어요.

저는 7살이었기 때문에 또렷하게 기억해요.

그 아이가 2살 때 죽었는데 그 죽은 애랑 똑같은 거야.

정말 얘가 부활해서 나를 치유시키려고 왔구나.

사실 루비를 안 만났었다면 아마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나 때문에 한 짐승이 죽었다고 하는 상처를 끌어안고 살았을 거예요.

그래서 쟤는 좀 특별한 애예요, 제 어릴 때 상처를 치유시켰기 때문에.

그래서 너무너무 이뻤죠.

저는 어릴 때 개나 고양이를 어느 정도 좋아했냐 하면, 침대에 양팔을 벌리면 한쪽은 개 또 다른 쪽은 고양이가 내 팔을 베고 잤죠.

반면 우리 어머니가 나 이쁘다고 끌어안으면 아주 소스라치게 도망쳤어요.

그래서 어른들이 쟤가 나중에 도대체 뭐가 되려고 사람 살을 저렇게 싫어하냐고 그랬죠.

그때부터 싹수가 있었던 거야.

또 어떤 때는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얘네들 깰까 오줌도 쌀 정도로 좋아했어요.

그러던 고양이가 나 때문에 죽었으니 어린 마음에 대못이 박혀 있었던 거죠.

그런데 저 루비가 눈빛도 그렇고 똑같은 거예요.

이렇게 나 때문에 죽은 그 아이에 대한 상처를 루비 때문에 난 치유 받은 거예요.

그래서 쟤는 너무 애틋하죠.

더군다나 5년 10년도 아니고 20년이에요.

진천본당, 감곡성당, 배티성지, 서운동성당, 은퇴하고 3년,

그래도 저는 올해는 넘길 줄 알았어.

사실은 걷는 것도 불편하고 그렇지만 얼굴은 역시 그냥 똑같아, 동안이야.

병원에 데려갔을 때는 며칠 안에 간다고 했는데 아무튼 2주 동안 내가 병간호했죠.

아침저녁으로 주사 놓고, 통조림을 갈아서 약을 타서 주사기로 해서 목에다 집어넣어 주었죠.

이렇게 2주를 버티다가 7월 20일 11시 15분에 갔어요.

사실 제가 그렇게 많은 개를 길렀지만, 직접 죽음을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에요.

내가 피정이나 해외에 갔을 때 죽는 등, 자기 죽는 모습을 보여준 애는 단 한 애도 없었어요.

그런데 얘는 내가 2주 동안을 거의 꼬박 밤새우면서 옆을 지켰던 거죠.

그래서 임종을 내가 본 거예요.

그리고 2주 동안 얘기를 많이 했어요.

왜냐면 쟤도 상처받은 것이, 서운동 성당에서 손바닥만 한 쵸코가 들어왔죠.

그러니 어린 쵸코 키우느라고 사랑이 나눠질 수밖에 없었죠.

루비 입장에서는 그랬던 것 같아요.

내가 조강지처인데 첩년이 들어온 거죠. 그것도 그냥 첩년이 아니라 아주 애굣덩어리 첩년.

쵸코가 매일 나한테 매달리고 사니까 루비가 6개월 동안을 토하더라고요.

수의사한테 문의하니 다른 고양이 받아들이는 데 6개월 내지 1년이 걸린대요.

그런데 쟤는 마지막까지도 안 받아주었어요.

쵸코가 애교 피우면서 어떻게든 가까이 가려고 해도 안 받아줬어.

쵸코도 2주간 내 옆에서 간호했고, 땅에 묻을 때도 내 발밑에서 쳐다보고.

지금도 쟤는 되게 우울해요. 그리고 밖에 나가면 항상 그 앞에 앉아 있어요.

그러니까 얘네들이 모르는 게 아니야.

동물들한텐 각혼이 있다고 하지만 각혼 이상이에요.

감각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람이랑 내가 볼 땐 똑같아요.

슬프고, 기쁘고, 우울할 때도 있고, 화날 때도 있고, 또 상처받을 때도 있고.

개나 고양이는 죽을 때 눈을 못 감고 눈을 뜬 채로 죽어요.

여러분 중에도 반려묘나 반려견 기르는 분들 많고, 또 이미 헤어진 아픔을 겪은 분들도 많죠.

그리고 또 그것이 되게 오래 가죠.

내가 카페 올리는 사진 보고 여러분들이 많이 공감하셨고,

또 어떤 분들은 신부님처럼 이렇게 보내 줘야겠다고 생각하신 분도 있었죠.

아직 저도 슬픔이 가신 건 아니죠.

그리고 사실은 좀 안 보이는 쪽에 묻으려고 하다가 너무 미안해.

그래서 이렇게 바로 바라보이는 곳, 창문만 열면 보이는 곳에 묻었죠.

밤에도 이쁘게 태양광 램프가 켜지고요. 카페에 올렸죠?

그렇게 항상 늘 가까이 느낍니다.

아무튼 이제 쵸코가 다섯 살인데, 쵸코를 먼저 보낸다면, 그냥 좀 자유롭고 싶어요.

이제는 더 이상 너무 힘들어요.

쟤네들로부터 받는 게 너무 많지만 그만큼 또 헤어질 때가 힘들다는 얘기죠.

 

오늘 노인과 조부모님을 위한 날이죠?

여러분들 할아버지 할머니도 기억나십니까?

저는 태어났을 때 친할아버지와 외할머니만 살아계셨어요.

친할아버지 고향은 이북 황해도 연백이라 피난민이죠. 그래서 인천에 살게 되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늑막염이 걸려 결핵이 되었어요.

그때는 약이 없던 시절인데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나이드라지트라고 하는 약을 우리 할아버지가

시계 보면서 먹이시어 나를 살리셨죠.

그 친할아버지가 내가 6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그때 나는 외할머니랑 살고 있었습니다.

외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할아버지 돌아가신 곳으로 갔는데, 정말 엄청 서럽게 울었어요.

그리고 2년 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사실 훨씬 더 오래 같이 외할머니랑 살았거든요.

그런데 외할머니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눈물이 안 나는 거예요.

산소 가서도 억지로 울려고 별짓을 해도 눈물이 안 나왔어요.

할아버지와는 많이 살지도 않았는데도 내가 할아버지 장례 때 펑펑 우는 것을 보고,

외할머니가 ‘아이고 저 새끼 내가 죽을 때도 저렇게 울까?’ 하셨거든요.

그 말 때문에 더 울어야 하는데 눈물 한 방울이 안 나네.

내가 지금 생각해 보니까 외할머니가 너무 갑자기 돌아가시어 그런 것 같아요.

외할머니 돌아가신 날, 우리 아버지가 세례받았어요.

우리 아버지는 명동에서 교리를 배우면서 세례받는 날이었죠.

우리는 인천에서 집안 식구들이 모두 명동으로 올라가려고 했죠.

외할머니는 그때 교우가 아니셨지만, 사위 세례받는 것이 좋은 일이니, 절구에 떡을 찧었죠.

그리고 옛날에는 방에 다락이 있었는데, 거기에 소쿠리 가지러 올라가다 쿵 하고 쓰러지셨죠.

뇌출혈이 된 거야. 그래서 2시간 만에 돌아가셨어.

아버지는 혼자 세례받으신 거예요.

가족들이 왜 안 오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처럼 휴대폰이 있던 시절이 아니 있잖아요.

어떻게 연락되어 서울서 총알택시 타고 인천에 오셨죠.

그리고 아직 몸이 덜 식은 장모님께 대세를 줬어요.

그러니까 아버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날 우리 외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신 거예요.

어제부터 이 생각을 하면서, ‘이런 날이 있었구나. 내가 왜 기억을 못 했지?’

물론 지금도 미사 때 할아버지 할머니, 또 내가 못 본 친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조상들을 위해서 항상 기도합니다.

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 하면, 나한테는 친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기억만 남아요.

또 그분들이 나한테 주었던 사랑과 함께.

우리도 자주 기도해야겠죠.

 

이제 오늘 강론으로 들어갑시다.

오늘 복음이 요한복음이죠.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다른 복음에도 나오죠.

그런데 오천 명이 아니라 사천 명을 먹였다고 나오죠.

 

오늘 오병이어 기적의 배경을 우리들이 확실히 좀 알아봅시다.

예수님과 사촌지간이었던 광야에서 외치는 이가 누구였죠? 세례자 요한.

그 요한이 목이 베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예수님이 들으신 거예요.

예수님이 얼마나 착잡하겠어요? 자기 사촌이 죽었고 또 요한과 예수님은 특별한 관계죠.

사실은 요한은 예수님이 안 나타났으면 메시아로 추앙받을 상황이었어요.

그러나 요한은 자기 동생이지만 ‘나는 이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하고,

또 자기 제자들한테 저기 하느님의 어린 양이 가신다 하면서 그리로 보냈죠.

예수님은 이 사촌 형이 너무너무 고맙고 의지가 됐죠.

그런데 그 요한이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죠.

왜? 슬픔을 정리하고 싶었던 거죠.

가셨을 때 배를 타고 가셨겠죠.

예수님은 배를 타고 가로질러서 건너편 산에 올라가셨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군중들이 여기까지 못 쫓아올 것으로 생각했죠.

그런데 오늘 성경에 나오듯이 기적을 눈으로 보고 체험한 군중들은 배를 타고 쫓아온 것이 아니라,

삥 둘러서 그 먼 거리를 예수님 계신 곳으로 쫓아옵니다.

성경에 오늘 남자만 5천 명으로 나와요.

그런데 모임에는 여자가 많아요, 남자가 많아요? 당연히 여자가 많죠.

그때 그 시절엔 더했을 거예요.

그러니 남자가 5천 명이니까 곱하기 3만 해도 만 오천 명이에요.

만 오천 명 정도의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 티베리아스 호수 둘레고 그 먼 길을 쫓아온 거예요.

이건 예수님은 생각하지 못했던 사건이었어요.

당시 인구 숫자라든지 교통수단이 없던 상황으로 볼 때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입니다.

저는 최고로 몇 사람 앞에서 피정 지도를 해봤느냐?

미국에 갔을 때 성령대회가 있었어요.

그때 전국 전미에서 뉴저지로 모였는데 대학교 강당을 빌려서 한 4,500명 정도가 꽉 찼어요.

물론 교구 성령대회 할 때마다 몇천 명씩은 다 들어오지만,

미국에 있을 때 진행하는 분께 물어보니 한 4,500명이 들어와 꽉 찼다고 해요.

그러니까 그때 당시 만 오천 명이면 소리가 들리면 얼마나 들리겠어요?

우리는 이 정도 거리인데도 내 마이크 쓰잖아요.

예수님은 저 앞에 계시는데 개미만 하게 보여요. 그래도 쫓아온 거야.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셔서 자리 잡고 앉으셨습니다.

앉으셔서 깊은 상념, 또 사촌 형과 여러 가지 착잡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데,

가만히 산밑을 보니 개미 떼가 바글바글 산으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이는 거예요.

새카맣게 많은 군중을 예수님이 보신 거죠.

좀 전에 얘기했듯 예수님이 이곳에 온 이유는 요한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착잡한 심정으로 사람을 피해서 왔던 것인데,

상황은 전혀 다르게 전개가 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첫 번째, 저 군중들이 배를 타고 편하게 온 것이 아니라 걸어서 얼마나 힘들게 왔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요.

더군다나 그 군중들 대부분은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이라 짐작되죠.

뭔가 예수님한테 청하고 치유받을 것이 있으니까 온 환자이기 때문에, 들것에 실려 온 사람, 업혀 온 사람,

정말 별의별 환자가 다 있었을 거예요.

지금은 암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암이라는 이름을 몰랐죠.

그때도 암이 왜 없었겠어요? 병명도 모르고 죽어가는 사람들 많았죠.

그러니 예수님은 ‘세상에, 어떻게 여기까지 저 먼 곳에서 와.’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고요.

두 번째, 예수님이 든 생각은 뭐냐?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가는데 배들이 얼마나 고플까?’

거기 쫓아온 양반들은 집을 나설 때부터 티베리아스 호수 그 먼 곳까지 가리라고 생각도 안 하고 온 사람들이에요.

그렇기에 음식을 싸가져 온 사람도 사실은 없었을 거예요, 일부러 안 내놨던 게 아니라.

‘배가 고플 것이다’라는 생각이 예수님 머리에 탁 든 거죠.

세 번째로는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

‘우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이 아니라 빵을 먹이는 거다.’

 

스승 예수님의 이런 고민을 눈치챈 열두 제자가 긴급회의를 한 후 예수님께 제안합니다.

뭐라고 제안해요? 아주 간단해. ‘돌려보냅시다.’

책임 못 지겠다 이거예요. 12명이 아무리 회의해야 뾰족한 수가 없어요.

그죠? 만 명이 넘는 사람을 어떻게 해요? 무슨 뷔페를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회의 결과는 뻔한 거야. ‘돌려보냅시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래 이거 도저히 안 되겠다.’ 그러실 줄 알았더니 뭐라 그래요?

엉뚱한 얘기를 하시죠. 이 지상의 현실을 무시하시면서 뭐라 그래요?

‘너희들이 뭐 좀 갖다 먹여라.’ 그래요.

환장할 노릇이죠. 12제자가 뭐가 있어요?

지상의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시고 ‘너희가 뭐 좀 갖다 먹여라.’

그래서 제자들이 ‘무슨 말씀이세요? 이 사람들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도 모자라요.’

이백 데나리온은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억이나 1억 5천 정도의 돈이에요.

‘그리고 그 돈이 있다 한들 어디 가서 살 것이며, 스승님 더위 잡쉈나, 이게 말이 됩니까? 우리 보러 해결하라니요?’

 

마태오 복음과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제자 전체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두 사람에게 묻습니다.

첫 번째는 필립보에게 묻습니다.

필립보는 왜 12명 가운데 나한테 갑자기 불똥이 떨어지나, 바로 못 한다고 그래요.

다른 열한 제자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칠지 봐 땅바닥만 쳐다보면서 머리만 북적북적 긁고 있고

어떤 분위기였을지 상상되시죠?

그런데 안드레아가 나서요.

안드레아는 누구 동생이죠? 베드로. 그 피가 있는 거죠.

베드로 성격 아시죠? 욱하고 그냥 밀고 나가는 것이 있죠.

그러다 혼나기도 많이 하고 실수도 많이 했지만 1대 교황 되셨잖아요.

형 베드로랑 똑같이 안드레아도 자기가 나서서 ‘아무튼 제가 찾아보기는 하겠습니다만, 아무튼 그것으로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 얘기는 뭐예요?

‘노력하겠습니다. 나머지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해결될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 하라 하시니 찾아보겠습니다.’

안드레아는 인간의 계산을 접고 예수님께 100% 신뢰하면서 찾아보겠다고 얘기한 거죠.

그래서 나가서 ‘음식 있는 것 있으신 분?’이라고 묻죠.

대부분은 음식도 없지만, 있어도 ‘이거 뺏기면 안 돼. 이거 먹어야 나 집에 갈 수 있어.’

어른들은 하나도 안 내놨어요.

누가 내놨어요? 아이 하나가 오병이어, 보리떡 5개와 말라비틀어진 물고기 두 마리.

모르긴 몰라도 그 아이도 환자였을 거예요.

엄마가 ‘그 선생님 가서 만나면 가능한 가까운 데로 비집고 들어가. 그리고 이거 누구한테 뺏기지 말고 배곯지 말고

며칠이라도 그분 쫓아다니면서 조금씩 떼어먹어라.’ 하면서 허리춤에 싸준 것일 겁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그것을 내놓은 거예요.

어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무도 하지도 않았는데 혼자 내놓은 거죠.

 

장정만도 5천 명을 먹였으니, 이 어마어마한 마치 홍해가 갈라지는 듯한 엄청난 기적은 두 개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기적이죠.

안드레아의 순명과 어린아이의 봉헌이에요.

순명 더하기 봉헌은 기적이 일어나요. 아멘

순명만 한다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야. 봉헌까지 이르러야 해요.

그래서 내가 늘 피정 때 얘기했죠.

치유받은 사람의 마지막은 뭐냐?

예수님이 하셨듯이 모세가 정해준 대로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걸로 끝나야 해요.

대부분은 치유받으면 ‘아이고 하느님 땡큐, 땡큐, 땡큐 쏘 마치’ 그리고 입 싹 닦죠.

살려만 주시면 뭐 하겠다 했던 것은 다 잊어버려요. 기억 안 하죠.

오죽하면 10명의 나병 환자를 치유시켰는데 한 명밖에 안 왔잖아요.

예수님 ‘9명 어디 갔느냐? 내가 분명히 열 명을 치유시켰는데.’ 하시죠.

사마리아 사람 하나밖에 안 왔잖아요.

인간은 급할 때는 하느님을 찾아도 하느님이 해결해 주고 나면 마음이 달라지거든.

 

순명 플러스 봉헌은 바로 기적이에요. 다른 말로 성체 성사의 기적이야.

첫 번째가 뭐라고요? 순명.

순명은 희망적인 삶을 나타내고 봉헌은 평화의 삶을 나타내요.

그래서 하느님께 순명 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희망론자, 긍정주의자들이에요.

세상을 어둡게 보려고 하지 않고 밝게 보려고 했어요.

저는 한 평생을 하느님께 순명했죠.

교회에 순명하고, 장상에게 순명하고 살았어요.

그리고 편하게 산 적은 없는 건 아시죠?

그런데도 저는 성격이 밝아요.

그리고 슬픔이 와도 사실 그것으로 며칠 괴로워하지는 않아요.

그것을 성화시키려고 애를 써요.

누가 나에게 상처를 줘도 아주 칼을 간 적 없어요.

‘그래, 저 사람 뭐 하느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흐르는 물에 씻어버리려 애를 많이 써요.

그래서 하느님에게 순명하는 자는 대부분 희망론자, 긍정주의자들입니다.

사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기에 물건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은 필립보를 떠보려고 하신 얘기죠.

필립보가 해결할 줄 알고 물어본 것이 아니잖아요.

3년을 예수님을 쫓아다녔는데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얼만지 테스트한 거예요.

필립보는 그 유혹에 넘어간 거죠.

 

필립보는 ‘왜 하필 저한테 그걸 맡기세요? 도저히 가망이 없습니다.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이 필립보를 우리들은 절망주의자, 회의론자, 부정론자라고 불러요.

부정론자라고 여러분들 잘 아는 얘기 있죠? 짚신 장사 이야기.

딸 둘 데리고 살던 부부가 둘 다 시집을 보냈죠.

하나는 짚신 장사하는 사람에게, 또 하나는 우산 장사하는 사람에게 시집을 보냈죠.

그런데 비만 오면 엄마는 징징거리고 울어요.

누구 생각하고? ‘아이고 짚신 못 팔아서 어떡해.’

해가 떠도 또 울어. ‘아이고 비가 와야 우산 팔아 작은딸 먹고사는데.’

이 엄마는 비가 와도 징징, 해가 떠도 장징징이야.

그런데 아버지는 반대야. 비만 오면 춤을 덩실덩실.

‘아이고, 비님 감사합니다.’

누구 생각하고? 이제 우산 팔아서 우거짓국이라도 끓여 먹겠구나.

또 해가 뜨면 방글방글. ‘아이고 해님 감사합니다. 생큐.’

누구 생각하고? 오늘 짚신 팔아서 호박죽이라도 끓여 먹겠구나.

아버지는 해가 떠도 웃고 비가 와도 웃는데, 엄마는 반대죠.

우리 믿는 이들은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해요? 아버지.

그런데 왜 맨날 징징거려?

그렇게 똑똑하게 잘 알면서 왜 허구한 날 징징거리고 인상 쓰고 사느냐 이거예요.

그것은 필립보의 마음이에요. 그죠?

안드레아는 그것이 아니었거든요.

순명은 희망을 나눈단 말이에요.

여러분들은 사시면서 어떤 말을 하는지 잘 몰라요.

그런데 ‘아니요, 싫어요, 못해요, 왜 하필 저예요?’ 이런 말이 불쑥불쑥 많이 나오는 사람들은 절대 순명 못 해요.

내가 본당 신부하면서 직책을 임명할 때가 있죠.

‘자매님 이번 평협에 뭐 맡아요.’ 하면, 그분은 다른 것 맡은 것도 많아요.

그런데도 ‘신부님, 부족한 저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능력은 많아 보는데 뭘 시키면 요리 뺀질 조리 뺀질.

시간도 많고 여유도 있는데 안 해.

‘아유 저 못 해요.’

‘제가 다른 본당에서 간부하다 상처받아서요, 저는 안 할래요. 혼자 주일만 지킬래요.’

 

‘아니요. 싫어요, 못해요’. 그 반대는 ‘예 좋아요. 기쁘게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야죠’

어느 쪽이 더 예뻐요?

잠언 13장 12절에 ‘희망이 끊어지면 마음이 병들고 희망이 이루어지면 생기가 솟는다.’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우리 아버님이 제일 좋아했던 성서 구절 로마서 8장 28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정말 우리 아버지는 이 성서 구절을 좋아하셨어요.

또 히브리서 7장 19절 ‘하느님께서는 더 좋은 희망을 주셨고 우리는 그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안드레아는 그거죠.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까지인지 압니다. 최선을 다할게요. 그다음에는 주님이 능히 하실 수 있다는 걸 내가 믿습니다.’

아멘

이것이 바로 우리 믿는 자들의 태도죠.

‘최선을 다하겠다. 모자라는 부분은 주님이 채워주실 걸 제가 압니다.’

순종은 선택해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이죠.

교회의 역사나 한 개인의 성화도 순종에 의해서 좌우가 돼요.

한 사제가 거룩한 사제로 살아갈 수 있느냐, 평신도가 거룩한 평신도가 될 수 있느냐,

수도자가 거룩한 수도자가 되느냐  하는 것은 바로 순명, 그게 바로 신덕이라고 그랬죠?

향주 삼덕의 신덕의 알맹이가 바로 순종이에요.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수많은 희생과 질투 속에 10년 동안 미사를 못 드리게 주변 사람들이 만들었어요.

그래도 그분은 순명했어요.

그리고 명예 회복이 됐을 때도 자기를 힘들게 했던 장상에 대한 말 조금도 한 적 없고

시기 질투했던 동료 사제들한테도 더 잘했어요.

 

순명 플러스 무엇이 기적이라고요? 봉헌

소년이 가지고 있던 보리빵은 가장 가난한 이가 먹는 것으로 그 자체로 볼 때는 싼 거예요.

요즘이야 일부러 영양식으로 보리빵도 먹지만, 옛날에는 먹어야 방귀만 뿡뿡 나오는 거였죠.

하찮은 것이었지만 그 소년이 내놓기를 거절했다면, 1만 5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이 위대하고도 찬란한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서 가장 큰 기적이 오병이어의 기적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보잘것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필요로 하시고,

또한 그것을 통해서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적을 요구합니다.

왜 기적이 안 일어날까? 성경에 그 답이 나와 있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우리 있는 그대로를 예수님에게 드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내가 늘 얘기하죠. 기적은 언제 일어나느냐?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마지막 한 조각까지 포기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치유의 기적 암이 낫는 기적을 원하면 암까지도 여러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내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라는 얘기예요.

그러면 바로 그 순간에 기적이, 치유가 일어나요.

기쁨의 기적, 여러분들 원하시죠?

그러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욕심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포기하세요.

여러분들이 기쁘지 않고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뭐냐?

아직 포기 못 하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대충 포기는 아니야, 마지막 한 조각까지 내놓아야 해요.

어둠의 제일 마지막 한 조각이 사라지면 빛이 들어오죠. 여명이 비쳐요. 유리창으로.

만일 우리가 있는 그대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의 제단, 순명의 제단에 바친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무수한 기적을 행하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역대가 전서 29장 16절에 역대기상이라고도 하죠?

‘하느님 손에서 받은 것이기에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나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정직한 사람들을 반기실 줄 압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사심 없이 비칩니다.’

또 요한복음 17장 19절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명심하십시오.

어떤 이들은 순명은 하는데 봉헌을 안 해요.

반대로 어떤 이들은 봉헌은 잘하는데 순명을 안 해요.

그래서 참다운 주님의 기적을 체험 못 하는 거예요.

순명 플러스 봉헌이 될 때 그때는 상상도 못 할 일이 일어난다는 것 기억하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오늘 집에 가서 땅문서 집문서 가지고 성당으로 찾아가면 큰일 나요.

여기 와도 나도 안 받아줘.

분별을 잘해야지요. 봉헌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받는 은혜, 또 성체를 통해서 받는 은혜, 또 성인들의 전구를 통해서 받는 은혜에 감사드립시다.

 

♣2024년 연중 제17주일 (7/28)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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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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