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무엇을 상상하든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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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8-06 | 조회수32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9,2-10).”
1) 하늘나라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나라” 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날마다 폭염 경보가 내리는 상황에서는,
폭염도 혹한도 없는 나라, 태풍이나 화산 폭발이나
지진 같은 자연 재난이 없는 나라를 상상하게 됩니다.
또 지금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전쟁, 테러 같은 일들을
생각하면, 전쟁, 테러, 갈등, 분열이 전혀 없는 나라를
상상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이 주님의 사랑과
평화 안에서 기쁨과 행복만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고,
또 진짜로 그 나라가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물론 믿고 희망한다고 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자격을 갖춘 사람만 들어갈 수 있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루카 20,35).
그 자격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만’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사람만 그 자격을 얻게 됩니다(마르 8,34).>
사도들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체험한 일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바로 그 하늘나라의 행복을 직접
체험했다고 증언한 것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본래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한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신 것은, 사도들에게
믿음과 희망과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때에는 그 체험이 별로 작용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사도들이 선교활동을 하면서 박해를 받을 때에는
‘큰 힘’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체험’이 금방 믿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오랜 시간 동안의 묵상을 통해서 믿음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체험을 하고서도 믿음을 갖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2)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한 말인데, 인간의 언어로는 그 모습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서 하얗게 빛났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나라를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났다는 말은,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두 인물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가 나눈 대화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관한 대화입니다(루카 9,31).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너무나도 행복하고 황홀해서 이곳에서 이대로 영원히
살면 좋겠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 것이고, 자신들은 그냥 노숙을 해도
괜찮다는 뜻도 들어 있는 말입니다.
<그만큼 행복하고 황홀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라는 말은,
황홀경에 취해 있었다는 뜻입니다.
“겁에 질려 있었다.” 라는 말은, 자신들이 체험하는 일들에
대해서 ‘깊은 경외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뜻입니다.
3) 사도들이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는 것도
중요한 체험이고, 증언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직접 증언해 주신 말씀,
즉 예수님에 대한 하느님의 ‘신원보증’과 같은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에서 ‘그의 말’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활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라는 예수님의 분부는,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믿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신원과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할(증언할) 자격이 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안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할(증언할)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이 ‘신앙의 증인’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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