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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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8-12 | 조회수55 | 추천수4 | 반대(1) 신고 |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마태 17,22-27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오늘 복음에서는 ‘성전세’에 대한 소소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예수님 일행이 카파르나움을 방문했을 때, 성전세를 걷는 이들이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던 것이지요. 세속의 권력자들이 말로는 국민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부르짖으면서, 정작 본인은 자기 권력과 여러 꼼수를 동원해가며 그 기본적인 의무조차 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았기에, 사람들 사이에서 큰 인기와 영향력을 지닌 예수님도 혹시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닌지 의혹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겁니다. 성전세는 로마 총독이 걷는 제국의 공적 세금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체적으로 걷는 인두세였습니다. 스무 살 이상 된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은 나라 안에 살든지 밖에 살든지 간에, 성전세로 은 반 세켈을 내도록 되어 있었지요. 그 돈은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유형의 공간인 성전을 유지 보수하고, 성전 일에 종사하는 이들의 삶을 보전하며, 예식에 필요한 것들을 사는데에 쓰였습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의 ‘교무금’에 해당하는 역할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 논쟁이 생기는 것은 예수님의 ‘신원’ 때문입니다. 세상의 임금들은 국민들에게서 세금을 걷지 자기 가족에게까지 그 세금을 부과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당신 아버지께서 머무르시는 성전에 관련된 세금을 굳이 내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 성전의 참된 주인이 예수님이기기에, 오히려 그 돈을 받으셔야 할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그렇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세를 기꺼이 바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비위를 건드리다’라고 번역된 부분을 원문 뜻 그대로 직역하면 ‘우리가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면 안되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사실 성전세를 걷는 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에게 맡겨진 직무를 정당한 절차에 따라 수행하고 있을 뿐이지요. 그런 그들에게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니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다며’며 납세를 거부한다면 그들은 자기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결과로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라는 자도 결국 세속의 권력자들과 똑같다는 ‘오해’를 하게 될 것이고, 자기들을 곤란하게 만든 예수님을 원망하며 죄를 짓게 되겠지요.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기꺼이 성전세를 내십니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 우리 구원을 위한 모범이 되시려고 세례를 받으셨던 것처럼, 성전세를 내실 필요가 없는 분이 남을 죄짓게 하지 않는 배려와 사랑의 모범을 보이시려고 성전세를 내신 겁니다.
다만,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성전세를 내십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아 그 입 안에 있던 돈으로 성전세를 내게 하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직접 노동을 통해 벌어서 마련하신 돈을 낸 게 아니니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그분의 신원이 손상되지 않습니다. 또한 당신을 위해 바칠 제물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는 야훼이레의 기적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가 ‘봉헌’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봉헌은 ‘나의 것’을 떼어 하느님께 바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것’임을 되새김으로써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예수님의 배려와 사랑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다른 이가 나 때문에 죄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사랑과 선행을 실천해야겠습니다. 그 사랑과 선행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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