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19,6)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시작부터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19,3)라고 묻습니다. 바리사이들이 거론한 신명기엔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증서를 써서 손에 쥐어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24,1)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는 철저한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회였고 시대였습니다. 여성이 남편의 눈 밖에 나면, 그 여성은 학대당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모세는 이런 여성을 남편의 학대에서 구출하기 위해, 아내를 집에서 내어 보내라, 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모세가 남성들에게 준 특권이 아니라, 지켜야 하는 법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기에 그 사실을 감안한 모세가 그 법을 제정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법을 남성들에게 허락된 특권이라 생각하였고, 예수님은 그것이 남성들의 학대에서 여성들을 구출하기 위해 모세가 제정한 법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 부부 관계에서 어떤 관계가 바람직한 관계일까요? 하느님은 시초부터 인간을 홀로된 존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성을 지닌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 더불어 살아갈 때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깨닫게 되고, 창조 목적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님께서는 “부부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19,6)하고 말씀하신 요지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부부가 한 인격체임을 깨닫기를 촉구하고,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자들에 대한 남자들의 횡포를 비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결혼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예수님은 강조하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혼인 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일방적이거나 불평등해서는 안 되고, 서로 사랑하며 존중하는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만 인간을 만드실 때 서로 돕도록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한 몸이 되게 하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부부란 서로 다른 존재이고, 그 역할이 다릅니다. 보완과 보충의 관계로 남편이 가정의 머리라면 아내는 가정의 심장과 같이 상호보완과 보충의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는 의미는 곧 혼인 불가 해소성의 근거입니다. 혼인은 부부들의 노력만으로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 안에 사랑과 치유 그리고 화해할 능력을 선물로 주셨고 이를 얼마나 잘 선용하느냐에 따라 하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혼인은 둘이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부부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잃어버리고 놓쳐버릴 때 부부는 하나가 아닌 정말 남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사로 맺어진 부부라도 부부생활을 하다가 여러 사정에 의해서 갈라선 부부도 예전보다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본인들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이고 아픔이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이혼한 신자는 민법상 재혼하지 않을 경우에 성사 생활에 지장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그들이 교회 안에서 충실히 성사 생활을 받을 수 있도록 교회는 그들을 유도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결혼 생활이든 독신 생활이든 만족한 삶, 행복한 삶이 중요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에게 기꺼이 교회 안에서 성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혼이 곧 죄가 아니며 고통을 겪었고 상처로 부서진 영혼들이기에 교회에서 상처받은 그들이 치유되어 충실히 신앙생활에 매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결혼한 부부가 삶의 마지막까지 살아갈 수 있기를 저는 간절히 바라고 그렇게 힘든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하는 분들에게 아낌없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제가 예전 베트남에서 생활하고 있었을 때 즐겨 봤던 주말 연속극이 ‘넝굴째 굴러온 당신’이었습니다. 극중 후반에 슬픔을 당한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가족 앞에서 두 번째 결혼식을 하던 날 국민 남편 ‘방귀남’이 가족들에게 고백한 말이 참 마음에 와닿더라고요. 『더 열심히. 더 대단하게. 더 닭살 돋게.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가슴 벅차게.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모든 부부가 방귀남과 차윤희 부부처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가슴 벅차게 사랑하며 살아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