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19,25)
예전 자주 들었던 광고,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 라는 표현 기억하시지요. 아마도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어떤 누구도 부자 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가 되면 정말 좋은 이유를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고 봅니다. 여러분 생각에, 부자가 되면 좋은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셨나요. 어느 투자가의 글에 부자가 되면 좋은 이유를, 첫째로 똑똑한 사람을 부릴 수 있는 특권이 생기며, 둘째 쓸모 있는 유능한 사람들이 모이고, 셋째 남들보다 많은 정보를 통해 자신감을 얻게 되며, 넷째 노후생활이 안정되고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표현했더라고요. 그러면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부자가 되면 좋은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면 좋겠네요.
우리는 어제 복음에서 일찍부터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하며 살아 온 어떤 부자인 젊은이가 이미 영원한 생명의 문턱 가까이 왔었으나,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19,21)라는 예수님의 권고를 듣고 슬퍼하며 떠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국 그 젊은이는 영생의 문턱에 도달하였지만, 그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걸림돌은 하느님보다 재물을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며, 영원한 생명과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가장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관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이냐, 재물인가”(6,24)라는 선택과 결단의 문제는 결코 생각만큼 쉬운 선택과 결정이 아닌 자신의 온 존재를 다 걸고 해야 하는 절박한 선택이며, 이는 단지 그 젊은이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내용을 전제하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19,24)하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대목은 자칫 잘못 이해하면 많은 오해와 갈등을 빚을 수 있는 미묘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훨씬 더 쉽다, 고 표현하십니다. 알아듣기 쉬운 표현이지만 상상이 잘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잘 아시는 것처럼 바늘귀에 실을 통과하는 것도 여간해서 힘든 일인데, 덩치가 제법 큰 낙타를 바늘귀로 통과시킨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과장된 표현의 밑바닥에는 그러니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한마디로 가능성 제로 상황으로 즉 거의 불가능하다는 강조이겠지요. 이런 예수님의 극단적인 표현에 제자들이 경악하며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19,25)라고 당연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어쩌면 부자인 젊은이의 실망한 모습을 보면서 그에 대해 스승이신 예수님의 민감한 반응이 아닐까, 라는 의구심이 들 만큼 강한 표현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의문처럼 정녕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일어납니다. 이런 제자들의 놀란 표정과 태도를 눈여겨보시면서 예수께서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19,26)라는 해법을 제시합니다. 어쩌면 이 과격한 비유 이면의 초점은 바로 구원이란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한 예수님의 의도된 표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있는 실낱과 같은 가능성의 해답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만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곧 어떤 인간도 자신의 힘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구원 곧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노력(=자력 구원), 곧 세상의 재물이든, 권력이든, 선행이든 자선이든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4,12)라는 베드로 사도의 재판정에서 증언은 그 자신의 삶을 통해 체험되고 터득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존재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그 젊은이는 그가 그토록 원하는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이 자기 앞에, 자기 가까이 와 있었는데도, 그 구원의 문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소유한 세상적인 재산에 대한 애착과 미련 때문에 구원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5,45) 분이시기에 원하시면 누구든지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도 부자들을 단죄하신 것도 아니고 구원에서 배제하신 것이 아니라, 고 봅니다. 그들 또한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당연히 구원될 것이며 구원하실 것입니다. 다만 젊은 부자를 바라보면서, 부자들이 흔히 겪는 문제 곧 세상의 재물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인데 마치 재물이 구원해 주는 것인 양,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경고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부자가 상대적으로 구원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인간 내면에 뿌리 깊은 소유욕과 재물의 노예가 될 수 있는 소지가 많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많이 소유하였으면서도 그 재물에 대한 집착과 욕심에 빠지지 않고,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섬김과 자신의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는 삶을 살아간다면야 이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없다, 고 봅니다. 물론 이처럼 자신의 소유로부터 자유롭고 재물을 통해서 올바른 곳에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전연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례가 성서 가운데 예리코의 자케오입니다. (루19,9) 그는 자신이 소유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부당하게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횡령한 것에 네 곱절로 갚아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이 미덕도 아니며, 부요함이 그 자체로 죄악도 아닙니다. 또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부자는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저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하늘나라는 들어가는 곳, 장소가 아니라 누리는 것,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양적인 물질이나 재물의 소유 여부에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소유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얼마만큼이나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느냐,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참된 섬김과 나눔을 누리며 사느냐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주어진 삶에서 비록 많은 재물을 소유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이 행복한 까닭이 무엇인지 그렇게 느끼지 못한 사람은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또한 남들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진 듯싶은데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볼 일입니다. 가지고 있음에도 누리지 못하면 아니 가짐만 못합니다.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주어진 삶 가운데서 하느님을 누리며 산다면 그게 참 행복이겠지요. 아마도 그런 영혼들은 주어진 모든 것을 감사하면서 남과 비교하지 않고, 주어진 작은 것에도 자족하며 살아가리라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 (2코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