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20,15)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맨 처음에 제 마음에 떠오른 표현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자주 표현하는 것처럼 ‘대박, 완전 대박’이라는 탄성입니다. 이보다 더 통쾌하고 예상을 깨트리는 답변이 어디 있겠으며, 이보다 더 짜릿하고 흥분되는 표현이 없으리라고 봅니다. 하느님 진짜 멋져 버려! 어쩜 살면서 제 안에 남과 비교하는 마음이나 시기하는 마음보다 이런 파격적인 자비심을 더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제 주변에서 많이 보고 있습니다. 조금은 부족하고 모자란 이들에 대한 배려와 보살핌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전엔 ‘포도원 일꾼들의 비유’라고 했는데, 새로운 번역본에는 본래 의도를 되살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20,1~16)라고 바꿔 부르고 있습니다. 이 차이는 결국 이 비유의 방점이 포도밭 주인의 공평하시고 자비하신 선한 호의와 베푸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포도밭은 하늘나라요, 장터(=인력시장)로 일꾼을 찾아 나가시는 분은 포도밭의 임자인 하느님이십니다. 마태오 복음에 보면, 포도밭 임자가 인력시장에 나가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하고 일꾼들을 자신의 포도밭으로 불러온 시간은 이른 아침,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로 구분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오 사가가 제시하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구분과도 같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각 시간대의 순서는 곧 구약의 선택받은 백성들로, 백성의 원로들과 지도자들, 대사제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일반 서민들을 그리고 신약의 새로운 백성인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 소외받은 사람들,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와 창녀들의 순서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린 시간의 차이처럼 하늘나라에 초대받은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후한 포도밭 임자의 마음이야말로 바로 아빠 하느님의 마음이며, 우리 역시도 하느님의 후한 베푸심을 본받아야 하리라 봅니다. 물론 인간적인 생각이나 계산법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노동법으로 보자면 정의롭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의 계산법이 세상적인 계산법과 같다면 소수 약자인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들이 비빌 언덕이 없어지는 것이고 희망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복음에 보면 포도밭 임자는 이른 아침부터 일을 시작한 일꾼에게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 그리고 9시에 만난 다른 일꾼에게 정당한 삯을, 아울러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엔 만난 이들에게도 동일한 삯에, 끝으로 다섯 시에 만나 일꾼에게는 그냥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문제는 일할 자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일할 기회를 준 포도밭 임자의 처신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후한 마음에서 참으로 일할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기회를 베풀어 준 것에 모든 일꾼은 감사하며 열심히 일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 것은 일을 끝내고 난 다음에, 관리인을 시켜 맨 나중에 온 이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루 품삯을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맨 나중에 온 일꾼들에게 자신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한 데나리온을 지불하는 것을 보면서, 이른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은 혹시나(?) 자기들에게는 맨 나중에 온 사람들보다 더 많은 품삯을 받는 게 아닐까, 하는 지나친 기대 곧 착각 속에 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착각은 자유이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착각이 자칫 맨 처음부터 온 자신들에겐 한 데나리온 이상의 품삯을 기대했다가 똑같은 품삵을 받자,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20,12)라고 불평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물론 인간적인 면에서 수긍이 가지만 터무니없는 불평임을 그리고 그들의 그런 볼멘소리는 우리네 삶에서 우리 역시 그렇게 치사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불편함이 마음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일할 능력이 부족하지 않음에도 일할 곳이 없어 초조하고 힘든 나날을 살아가는 동업자들에게 “참 잘 되었네. 오늘 다행이네. 먹을 것을 살 돈이 생겼으니”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하고, 자신이 제대로 품삯을 다 받았는데도 다 받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 불편함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볼 일입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는 말을 조롱이나 하듯이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20,15)라는 포도밭 임자의 말에는 포도밭 일꾼들과 같은 존재인 우리의 근거 없는 기대감 내지 지나친 바람에 대한 포도밭 임자의 통렬한 질책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한편은 찝찝한 느낌이 들지만 다른 한편 포도밭 임자의 화끈하고 후련한 질책이 통쾌함을 가져다주기에 마음 편해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은 어쩌면 하느님의 크시고 후한 사랑과 자비에도 배가 아플 것입니다. 공평과 정의의 잣대를 고집하고 주장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마저 시비를 걸고 불평할 것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포도밭에 나와서 일한 사람은 오후 다섯 시쯤에라도 나와서 일하게 되고, 자기 동료가 포도밭 임자로부터 자기와 같은 품삯을 받게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의 슬픔을 함께 나누듯이, 이웃의 기쁨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감사하며 함께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많이 차지하고 혼자서 누리는 하늘나라는 정감이 없고 삭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일할 수 있고 빨리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이나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그날에 필요한 만큼의 품삯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하루 한 데나리온은 그날에 필요한 만큼의 은총의 양이라고 보며, 모든 사람이 각자의 받은 은총에 감사하고 비교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받은 무상의 선물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만족한 그 상태가 바로 하늘나라가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