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하늘나라의 잔치는 남의 잔치가 아니라 ‘나의’ 잔치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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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8-22 | 조회수49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 22,2-10).”
1) 하늘나라의 혼인 잔치는 ‘남의 잔치’가 아니라 ‘나의 잔치’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는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2코린 11,2ㄴ).”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임무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혼인 잔치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입니다. 따라서 ‘나’는(모든 신앙인은) 하늘나라의 혼인 잔치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공입니다. 그 잔치는 바로 ‘나를 위한’ 잔치입니다. 내가 무사히 하늘나라에 잘 도착했음을 환영하고 축하하는 잔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초대’ 라는 표현과 ‘손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그것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을 하는 것처럼 하는 사람들을 꾸짖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신앙생활은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려고, 내가 원해서 하는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초대받은 손님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기다리시는 집으로, 아버지의 집이면서 동시에 ‘나의 집’인 그 집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2) ‘혼인 잔치’ 라는 말에서, ‘혼인’은 예수님과 신앙인의 ‘일치’를 나타내고, ‘잔치’는 “하느님의 나라는 곧 기쁨의 나라”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치’와 ‘기쁨’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제시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우리가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고, 그 일치 자체가 곧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이미 시작된 것이고, 나중에(종말에)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기쁨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고, 동시에 그 기쁨을 ‘지금’ 누리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5절의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 간 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다른 것에서, 즉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에서 기쁨을 찾는 자들입니다. 과연 그런 것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에 따라서 잠깐 동안 즐거움을 얻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 즐거움은 금방 허무하게 사라집니다.
3) ‘혼인 잔치의 비유’는,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 또 신앙생활을 하긴 하는데 세속의 생활을 신앙생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겨냥한 비유입니다. 자기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위선자들도 포함됩니다. 잔치에 참석하지 않고 밭으로 가거나 장사하러 간 자들은, 참석하겠다고 응답을 했으면서도 실제로 참석하지는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입으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는 않는 사람들입니다(마태 7,21). <원래 이 비유는 유대인들을 겨냥한 비유이고, 그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이방인들에게로 구원의 은총이 넘어간다는 뜻인데, 사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이나 그들의 구원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우리 자신의 구원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었다고 해도,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에 도달하지 않으면, 그것은 처음부터 신앙인이 되기를 거부한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나는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가?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신앙생활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가?”를 심각하게, 또 진지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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