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을 맞아 당신의 고향 나자렛 회당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펼치시며 당신에게 해당되는 구절을 장엄하게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를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명명백백하게 밝히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외아들이자 메시아임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파견되신 이유도 분명히 밝히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우리 인간들의 위로자요 해방자, 구원자가 되기 위해 오셨음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양한 속박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해방자로 오셨다는 말씀에 참으로 큰 위로와 기쁨을 얻습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다양한 사슬에 묶여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무거운 죄의 사슬, 아무리 노력해도 호전되지 않는 영혼의 병,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 자신이라는 굴레... 이토록 오랜 노예 생활과 유배 생활 속에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의 해방자로 오셨다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또 얼마나 반가운 말씀인지요? 육체적으로 눈먼 이들의 시력을 되돌려주시는 것은 일종의 표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 중요한 회복은 영적인 시력의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정신의 눈 멈, 본질적인 것, 특히 하느님의 빛으로부터 멀어진 영혼의 암흑으로부터의 회복은 얼마나 더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두운 이 세상에 찬란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이제 우리 인간 이성의 빛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이성의 빛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빛을 통해 더이상 어두워지지 않을 참된 광명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성의 빛(lumen rationis)은 계시의 빛(lumen revelationis)으로 변형되고 드디어는 영광의 빛(lumen gloriae)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서 낭독이 끝나고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촌철살인의 말씀 한마디를 덧붙이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명료한 말씀에 많은 사람들이 경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그런 말씀이 흘러나온 것에 대해 놀라워하면서도 구원의 기쁜 소식에 열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더니 여기저기서 불신과 비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목소리가 이것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사람들의 태도가 돌변해버린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나자렛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잔뜩 기대했을 것입니다. 메시아는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며 순식간에 자신들의 처지를 180도 뒤바꿔주실 분으로 기대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지상적 번영이나 물질적인 부, 강력한 정치력,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사실 메시아를 통해 기대했던 것은 빵, 기적, 권세,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력히 요구하신 것은 회개와 새 생활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간단한 예수님의 요구조차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완고해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자신들의 눈앞까지 다가온 구원을 발로 차버리는, 그래서 그 구원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차지가 되고 마는 불행을 선택한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