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나해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미사 끝나고 갈 때의 기분은 어때야 할까?> 복음: 루카 4,38-44
하느님의 아들이며 말씀이신 그리스도
(1540-1550), 모스크바 크레믈린 Cathedral of the Sleeper |
며칠 전에 노숙자를 위한 성남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김하종 신부님을 만나게 된 것은 지인의 소개를 통해서였는데, 저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 봉사할 기회가 없었기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봉사를 몇 번 하고 그만두었습니다.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노숙자들에게 밥을 준다고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분들이 다 고마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사제로서 봉사하면서 영광을 추구했는지도 모릅니다. 같이 봉사하는 분들이 오래되었다고 자기 자리에서 텃세를 부리는 것처럼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숙달되지 못한 저는 약간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봉사가 금방 지쳐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김하종 신부는 어떻게 40년 가까이 그런 봉사를 이어가며 “나는 봉사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며칠 전에도 노숙자들이 싸워서 말리다가 주먹으로 가슴을 한 대 맞았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노숙자에게 손을 물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여덟 번 그들의 신고로 경찰서에 가기도 하였습니다. 마음이 더 아프다고 합니다. ‘내가 몇 년 동안 먹을 것을 주었는데….’ 저와 김하종 신부님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저는 봉사하는 목적을 제가 정한 것이었지만, 김하종 신부님은 사명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로 그 사명을 되새기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악령을 쫓아내시다가 새벽에는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군중이 찾아와서 떠나지 말고 더 머물러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파견’입니다. 기도는 파견받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파견받으면 봉사와 사랑에 지치지 않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일하던 한 선교사가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열정을 쏟았음에도 아무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배에는 휴가를 얻어 아프리카에서 사냥하고 돌아오는 미국의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하였을 때 은은하게 울리는 군악대들의 예포 소리와 함께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이 부둣가에 나와 있었습니다. 배에서 대통령이 내려올 때 거기에는 붉은 주단이 깔렸고 많은 사람이 대통령을 맞이하였습니다. 대통령이 지나가자 붉은 주단은 걷히고 군악대의 나팔 소리도 멎었습니다. 그 뒤를 선교사 홀로 고독하게 내려왔습니다. ‘사냥을 갔다 오는 대통령은 저렇게 환영받는데, 큰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부인마저 잃고 선교하다가 돌아오는 나를 맞이하는 환영객은 아무도 없구나!’하는 생각으로, 고독감과 실패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아직 고향에 돌아온 것이 아니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군악대의 나팔 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하늘의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내가 맞이해 주마. 붉은 주단이 문제가 아니라 황금의 유리길을 깔고 내가 친히 너를 마중 나오마. 사랑하는 아들아 끝까지 충성하라!” 이 말씀을 들은 선교사는 크게 뉘우치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성당 밖으로 나갈 때의 기분은 이래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 후에 “자 일어나, 가자!”라고 하신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아야 합니다. 미사 후에 ‘오늘은 무엇을 하도록 주님께서 파견하실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미사는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영광의 상징입니다. 모든 기도는 그렇게 끝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가 휴식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