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단식 그 자체보다 그 동기를 / 연중 제22주간 금요일(루카 5,33-3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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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9-05 | 조회수79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단식 그 자체보다 그 동기를 / 연중 제22주간 금요일(루카 5,33-39)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 제자들은 먹기만 하는군요.”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은 음식을 끊는 행위이다. 먹기 싫어 그러는 게 아닌 먹고 싶어도 참는 거다. 그러므로 ‘동기’가 중요하다. 그래야만 인내가 생긴다.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겼을 때 단식하라.’신다. 신랑은 예수님 자신이니까. 당신의 십자가 수난에 동참하려면 단식부터 해야 한단다. 이처럼 진정한 변화를 느낄 때, 그분의 이끄심을 체험한다. 예수님은 단식보다 단식의 동기를 더 중히 여기라신다. 단식은 절제를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일 게다. 비단 그게 단식뿐이랴? 모든 게 그 원인을 알면 활동은 훨씬 자유로워진다. 그게 정녕 힘이 되고 용기를 주는 것일 게다. 단식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겠다. 예로부터 많은 종교가 음식에 대해 쾌나 까다로웠다. 지금도 ‘못 먹는 음식’을 규정한 종교가 많이 있을 정도이니까.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음식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닐 게다. 다만 그것을 먹는 이에게는 다소 책임이 있으리라. 어쩌면 음식의 절제는 보통은 자유로움을 준단다. 그만큼 매사가 기쁜 삶으로 바뀐단다. 본능을 절제함으로써, 예수님 수난에도 동참할 수 있다. 사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경건한 이들이었다. 다만 율법에 충실하고 신앙심이 깊었지만, 하느님의 옛 약속이 새로워지고 있음을 깨닫지를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과 기도를 하곤 하는데, 당신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군요.”라며 따졌다. 신약의 주인인 예수님의 현존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율법의 규정은 예수님으로 완성될 게다. 그렇지만 그들은 율법을 엄격히 지키기에만 몰두했지 하느님 구원계획을 몰랐다. 누가 뭐래도 세상에 활기를 불어넣는 참된 신앙은? 이웃 섬기는 모습, 반복되는 일상을 늘 새로운 마음으로 맞는 그 자세일 게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나의 믿음과 생활이 그리스도 한 분을 향하여 있고, 그분께서 우리의 중심에 있는지를 살펴보자.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주님 말씀으로 성숙되는지를, 정녕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 어쩌면 자신만의 생각을 고집하며 완고하게 사는 모습인지를 자주 살펴보는 삶에서 믿음의 성숙함이 드러날 게다. 우리의 의무적인 단식은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이다. 물론 개인적인 단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실 예수님은 단식과 그 동기도 중히 여기셨다. 그렇지만 단식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먹는 자유를 절제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는 거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고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오로지 당신 계명을 지키려면 주위의 어떠한 구속과 눈치 볼 것도 없이 스스로를 감당해 낼 수 있는 새 부대가 되어야 한단다. 새 계명을 위한 새 부대가 된 이는, 모든 계명을 지키면서도 그 자체만으로 행복한 사람일 게다. 신앙생활의 모든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단식은 주님 섬기는 한 방법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단식 그 자체에만 매달려, 본질을 망각한 어리석은 이가 되지 않도록 하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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