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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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9-12 | 조회수84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루카 6,27-3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마음으로 조금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사람도 아니고, 나에게 큰 상처를 주고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니 참으로 막막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사랑과 자비의 주님이시니 그런 일이 가능하겠지만, 부족하고 약하며 감정에 쉽게 휘둘리는 미숙한 존재인 나로서는 원수의 잘못을 그저 용서하는 수준도 아니고 다짜고짜 그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너무나 무리한 요구처럼 느껴지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원수는 처음부터 원수였던 게 아닙니다. 나와 원수가 된 이들 중 약 90% 정도가 나와 잘 알고 지냈던, 꽤나 친했던 이들입니다. 그들 중엔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으며 같은 성당 교우들도 있지요.
그렇게 잘 지내던 이들이 왜 갑자기 ‘원수’가 되었을까요? 내가 그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대로 그들을 무턱대고 믿었다가 그들이 내가 기대하고 바라던 대로 따라주지 않는 ‘배신’을 당한 것입니다. 내 나름대로는 그를 소중하게 생각하여 돈을 꾸어주기도 하고 이것 저것 잘 챙겨주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 사람은 나를 그 정도로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점이 실망이 되고 서운함이 되고 상처가 됩니다. 그 상처를 계속해서 곱씹을수록 상태가 심해지고 내 마음에서는 미움과 원망이라는 고름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니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이 굳어지면서 그는 나에게 더 이상 상종 못할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사람을 믿은 게 왜 잘못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을 신뢰하는 것 자체가 윤리 도덕적인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함부로 믿는 건 절대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나중에 어떤 선택을 할지 나 자신조차 모르는데, 다른 사람을 믿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을 믿을까요? 다른 사람을 믿는 그 근간에는 나 자신을 믿는 ‘교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철저한 성찰 없이 나 자신이 어떤 일을 충분히 잘 해 낼 수 있을 거라고, 나 자신이 그런 잘못을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버리니 다른 사람도 그럴 거라 기대하고 믿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는 이유는 다른 이들을 통해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걸 채우고자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혼자 힘으로는 그것을 다 채울 수가 없기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기대와 바람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대로 따라주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면서 말이지요.
그렇기에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은 ‘자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원수는 결국 내가 스스로의 욕심에 휘둘려 다른 사람을 함부로 믿음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니, 그 욕심을 버리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겁니다. ‘자비’는 나 자신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서 보이는 특징입니다.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철저한 자기성찰을 통해 스스로가 얼마나 부족하고 약한 존재인지를 잘 압니다. 또한 자기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도 자기처럼 부족한 존재임을 알지요. 그래서 섣불리 다른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대로 그가 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부족하고 약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 부족함은 오직 하느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자기 것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베풀고 나누면 하느님께서 거기에 넘치도록 후하게 덤을 얹어서 나에게 큰 은총과 복으로 되돌려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직 하느님만을 굳게 믿으며 다른 이의 부족함과 약함, 실수와 잘못을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사람에게 실망할 일도, 내 마음 속에 원수를 만들 일도 없을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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