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영근 신부님-“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마르 8,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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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9-15 | 조회수66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 오늘의 말씀(9/15) : 연중 제24주일 * 제1독서 : 이사 50, 5-9ㄴ * 제2독서 : 야고2, 14-18 마르 8, 27-35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30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오늘의 강론> 오늘도 우리는 길을 걷습니다. “나그네 설움”이라는 ‘옛 노래’가 떠오릅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그러나 우리는 정처 없이 걷는 발걸음이 아니죠! 우리는 분명 그분과 함께 동행 하여 걷고 있으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걸으니까요! 오늘 <복음>은 바로 길을 동행하여 걸으면서 스승이 제자들에게 “스승을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이 가는 길’과 ‘참된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더구나 이 가르침은 스승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죽음의 행진을 막 시작하면서 말씀하고 계시기에, 그 간절함이 베여있는 가르침입니다.
순교성월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제1 독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들려준 ‘주님의 종의 노래’로, 메시아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이들에게 뺨을 내주고, 모욕과 수모를 받으면서도 얼굴을 가리지 않을 것이나, 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고 전합니다. <제2 독서>는 그분을 믿는 이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녀야 할 ‘믿음의 실천’에 대한 야고보 사도의 권고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미리 준비시키시는 장면인데,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수난예고’와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 받아야 할 고난’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에 대한 군중들의 여론을 물으신 다음, 제자들에게 시험문제를 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 그러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베드로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알려주는 ‘그리스도’는 황당하리만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마르 8,32)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마르 8,31-32)
여기에서, 우리는 “반드시”(Dei)라는 말과 ‘명백히’(parresia)라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길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로, ‘명백히’(parresia)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반드시”라는 단어는 세 가지 뜻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의무와 책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고난과 배척을 겪고 죽임을 당하시는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괜찮은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사랑의 의무이며 책임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하겠다는 뜻을 나타내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배척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는 일을 ‘반드시’ 실현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는 아버지의 뜻에 절대 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가짐, 곧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반드시’ 해내고 말리라는 투철한 사명감과 각오를 말해줍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명백히’(parresia)라는 단어는 공관복음에서 유일하게 여기에서만 한 번 쓰인 단어로, ‘자유를 가지고 용기 있게 그리고 분명하게’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는 어렴풋이 알아듣거나 대충 알아들어서는 안 되는 그야말로 명백하게 알아들어야 할 내용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 길은 우리가 ‘명백히’ 알고 분명하게 따라가야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길은 대체 어떤 길인가?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곧 <첫째>는 한두 가지나 혹은 몇 가지의 고난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둘째>는 단지 배척과 거부를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 이요, <셋째>는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는 일’ 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걸어야 하는 길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길임을 밝혀줍니다. 곧 스스로 만들어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묵묵히 수행해 가는 길인 것입니다. 의탁과 신뢰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당하면서도 자유로이 흔연히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에게 이러한 내용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사실, 그들도 당시의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광스럽게 개선하는 ‘왕’ 메시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천부당만부당한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또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사실에 당혹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서서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바로 전에 “복 받은 이”(마태 16,17; “너는 행복하다.”)로 칭찬받던 베드로는 이제 “사탄”이라고 호되게 꾸지람을 듣습니다. 사실, 그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관련된 하느님의 계획에 맞섰던 것입니다. 사막에서의 유혹자처럼, 그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위해 마련해 놓은 계획과는 다른, 사람들의 방식으로 구원자가 되라고 반박한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사람의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그것을 통해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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