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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4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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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4-09-15 조회수38 추천수5 반대(1) 신고

[연중 제24주일 나해] 마르 8,27-35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람은 그 안에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는가에 따라 겉모습까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음 속에 하느님의 뜻을 품고 살아가며 그 뜻을 따르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겉모습 역시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하게 되고, 마음 속에 욕심과 집착을 품고 살아가며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뜻마저 거스르며 살아가는 사람은 어둠 속에 숨어지내는 ‘악마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가 그런 두 가지 모습을 다 지니고 있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당신의 신원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십니다. 마음 속에 올바른 ‘그리스도상’을 간직하고 있어야만,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믿음과 희망의 힘을 바탕으로 당신을 따르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지만, 그 답은 원론적으로는 ‘정답'이면서도 인간적인 편견과 오해 때문에 아주 큰 ‘오답’이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주실 메시아, 즉 ‘그리스도’가 강력한 카리스마와 정치적 지도력을 바탕으로 압제세력인 로마를 힘으로 물리치고, 그동안 자기들을 괴롭혀 온 주변의 이방민족들을 철저히 응징하며, 율법을 어기는 죄인들을 엄격하게 처벌해 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되고자 하신 ‘그리스도’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시고, 원수의 죽음이 아닌 회개와 구원을 바라시며, 죄인을 가혹하게 처벌하시기보다 큰 용서와 자비로 끌어안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원칙을 바탕으로 하느님께서 당신께 맡기신 이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마지막엔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결심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되고자 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유다인들이 기대하고 바란 것과 너무도 달랐기에, ‘스승님은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자칫 당신의 신원에 대한 오해를, 더 나아가 그리스도 신앙 자체에 대한 오해와 절망을 야기할 소지가 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신원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던 겁니다.

 

그러고 나서 하신 일이 제자들의 마음 속에 참된 ‘그리스도’의 모습을 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크게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는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과정에 있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셔야만 했습니다. 겨울을 보내지 않고는 봄이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거센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고는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심어주신 말씀의 씨앗은 노력과 수고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하는 과정에도 고난과 역경이 빠질 수 없는 것이지요. 둘째, 그리스도는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박해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놀라운 ‘신비’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섭리하시는 방식은 자기 욕심을 먼저 채우려 드는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하시는 예수님은 이 세상을 자기 뜻대로 쥐고 흔들려는 권력자들에게 눈엣가시처럼 여겨져 배척과 박해를 피할 수 없는 겁니다. 셋째, 하느님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뜻에 철저히 순명한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고 그가 당신 나라에서 큰 영광과 기쁨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받을 수 있는 최대의 보상이자 그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지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그분의 모습을 마음에 품고, 나도 그분처럼 되기를 희망하며 이 힘들고 어려운 신앙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과 생각이 달랐던 모양입니다. 입으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삶으로는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일’보다,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사람의 일’을 우선시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시려는 ‘십자가의 길’이 자기가 원하고 바라는 ‘영광의 길’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처럼 보였기에, 예수님이 그 길에 들어서시면 자신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뜻과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것만 같아 불안했기에 예수님이 그 길에 들어서시지 못하도록 그분 앞을 가로막은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모습이 어디 베드로에게만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그저 내가 어렵고 힘들 때 그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시는 분, 나에게 특별한 은총과 복을 내려주셔서 내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시는 분으로 믿고 있지는 않은지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그분의 일보다는 내가 그분을 이용하여 이루고자 하는 나의 일에만 신경 쓰고 있지는 않은지요? 기도할 때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뿐, 정작 그분이 내 삶에 관여하시지 않기를 바랄 때가 더 많지 않은지요? 그렇다면 우리도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는 예수님의 불호령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데 필요한 ‘사람의 일’ 자체가 별 거 아니라고 폄훼하시는게 아닙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 아예 신경쓰지 말라고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엄연히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존재이니 당연히 ‘사람의 일’도 신경 써야지요. 다만 그걸 ‘하느님의 일’보다 우선시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먹고 사는데 꼭 필요한 것들을 얻는 수준을 넘어서서,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고 팔고 심고 짓고’ 하는 세상의 일에 목숨걸고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사람의 일’이라는 이정표만 보며 길을 걷다가는 하느님 나라로부터 점점 멀어져 멸망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길을 걷는 우리가 따라가야 할 이정표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매번 세상과 하느님 나라로 갈라지는 갈림길을 마주할 때마다 올바른 길을 선택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지요.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마음 안에 심어주신 ‘양심’이라는 훌륭한 내비게이션이 있지만, 고집과 편견이 우리 눈을 가리고, 욕심과 집착이 우리 판단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눈으로 볼 수 없고 그분 목소리를 귀로 들을 수 없는 우리의 인간적인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직접 앞장 서시겠다고 하십니다. 당신이 먼저 구원의 길을 걸어 가실테니, 당신을 믿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따르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원칙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선택의 갈림길을 마주할 때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며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억지로 힘들게 다른 노력들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내 안에 자리잡은 고집과 편견, 욕심과 집착들을 조금씩 비워내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을 머리로 아는 ‘믿음’과, 그분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짊어지신 십자가를 나도 기꺼이 짊어지는 ‘실천’사이의 거리가 곧 주님과 나 사이의 거리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라는 헛된 망상을 쫓는 이는 신앙생활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고통과 시련을 회피하는데에만 신경을 쓰지만, ‘주님께서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음’을 참으로 믿는 이는 그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지요. 그 실천이 주님과 나 사이에 견고한 사랑의 유대를 만들어 줍니다. 그 유대가 있어야만 주님의 뒤를 따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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