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마태오가 따라간 그 숙명의 길을 /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마태 9,9-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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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9-20 | 조회수67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마태오가 따라간 그 숙명의 길을 /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마태 9,9-13)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오를 불렀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그는 곧바로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 이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 제자들께 일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닌 자비다.’라고 하신 그 말의 뜻을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인 마태오의 직업은 세리였다. 세리는 자기 민족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제국에 바치는 지배국의 앞잡이 노릇과 자신들 잇속을 채우려 세금을 과다하게 부과도 했다나. 따라서 유다인들은 영혼과 민족을 파는 그들을 몸을 파는 창녀보다도 더 심하게 멸시하였단다. 마태오는 주님 은덕을 입은 자라는 뜻이다. 세리는 그가 개인적으로는 어떤 이었든 간에, 당시 그네들 사회에서는 공공연히 독사 같은 매국노로 지독한 지탄을 받던 인물이었다. 이 마태오를 예수님께서는 제자로 부르시고는 곧장 그의 집에 가시어 여러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기까지 했단다. 그리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게 아닌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라고 큰소리까지 치셨다. 죄인은 치유 대상이지 단죄할 이가 아니라나. 죄를 지었다고 격리가 아닌, 어떻게든 그 죄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어야만 된다는 거다.
암튼 먼저 부르심 받은 다른 이들에게도 이 일은 여러모로 언짢았을 게다. ‘저런 인간을 우리와 한 무리가 되게 하시다니.’라면 자존심 상했을 수도. 아마도 어부는 세리와는, 세리는 어부와 어울리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으리라. 이처럼 어쩌면 예수님이 제자를 선택하신 그 내막은 다소 힘든 부분이 있었다. 어부들은 그 비린내 나는 손 때문에 다른 이들과는 악수하기조차 꺼리는 이들이었고, 세리는 민족의 반역자라 하여 유다인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아무튼 예수님은 죄 많고 작은 이, 멸시의 대상들을 제자로 부르셨다. 당시에는 가히 파격적이었다고나 할까. 보신 눈이 세상 시각과는 확연히 다르셨다. 세상 기준으로는 별 볼 일 없는 그들을 꼭 필요한 이로 뽑으신 거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일할 이를, 이런저런 조건으로 골라 뽑는 우리네 모습이 주님 앞에 부끄럽기까지 하다. “나는 의인보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부르심에 거침없이 순종한 마태오는 자신이 세리였음을 고백한 겸손한 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선하다면서 누구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고 자만하는 이가 아닌, 가책을 느끼면서 절실하게 도움을 간청하는 이를 부르러 오셨다. 그렇게 예수님은 어둠의 자식이라 일컫던 그를 제자로 선택하셨다. 그의 직업을 보신 게 아니라 오로지 사람 됨됨이로만 보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고 이르셨다. 희생 제물이 오로지 이웃에 대한 순수한 자비로 이어지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희생 제물은 즐겨 받지 않으신다는 뜻일 게다. 사실 주님께 받은 것에 감사해서 나의 것을 내어놓는 그 행위 자체가 봉헌이다. 그런 이들은 이웃에게 무자비할 수가 없다.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과 이웃을 향한 자비는 하나이다. 우리 역시 예수님 부르심으로 축복 입은 이다.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그분 초대에 실로 부응하는지? 마태오가 따라간 그 숙명의 길을, 그날까지 끝까지 따라는 갈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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