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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반영억 신부님_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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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9-22 조회수75 추천수3 반대(0) 신고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눈높이로 내려오신 주님의 사랑과 겸손을 생각하는 가운데 모두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바실리오 성인은“여러분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랑과 희망을 하느님께 두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겸손의 의미를 잘 가르쳐 줍니다. 겸손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의 가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나”를 인정하는 것이 참된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순하고 얌전한 사람의 모습이 겸손이 아니라 나의 능력과 성공을 기뻐하되 교만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 특히 ‘내가 너보다 더 낫다’, ‘내가 너보다 더 고참이다’, ‘내가 더 연장자다’ 하는 생각을 다스립니다. ‘일은 내가 더 했는데 나보다 저 사람을 더 알아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아직 겸손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겸손은 자기 자신에 대해 인정받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자랑하는 것(성 아우구스티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 하였느냐?” 물으셨고, 제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은 아주 가슴 아픈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예고를 하셨는데 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전혀 엉뚱한 문제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가파르나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생각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볼산에서 영광스러운 변모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시련이 올 때 그것을 기억하며 극복하도록 안배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수난과 죽음에 관해 관심이 없었고, 높은 자리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베드로일까? 안드레아, 아니면? 요한...줄 끊어질까 조바심을 갖는 것은 요즘도 여전합니다. 사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다 큰 사람은 아닌데도 말입니다. 큰 사람은 품이 큰 사람이요,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우리 신부들도 인사 철이 되면 누가 어느 본당으로 가나?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자리가 어디든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열두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 고 말씀하셨는데 꼴찌가 되고 종이 되라는 말은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섬긴다는 것은 나 중심으로 살지 않고 상대방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가지고 그의 행복과 완성을 위하여 나의 정성과 노력을 다하고 심혈을 기울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은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압니다. 그래서 사랑은 위대합니다. 어떤 분이 사업이 잘되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분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참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성공했다는 것은 그 재물을 어떻게 잘 썼느냐가 결정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며 헌신 봉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섬기기 위해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6,-8).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며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끌려다니지 않고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우리의 모습이 빛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빛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세우시고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여라!’ 하신 이유는 어린이의 단순함과 순진무구, 천진난만한 모습을 받아들여라! 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린이는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부모나 다른 사람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에 의지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앞에선 인간은 하느님께 온전히 낮추어 의탁하는 존재, 하느님의 사랑과 도움에 힘입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또 하나, 당시 사회에서는 어린아이는 미성숙한 존재로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껴안으며 말씀하신 모습은 사랑의 행위요, 구원을 이루는 모습입니다.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소외되고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꼴찌가 되고, 종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할 수밖에 없고 그러기에 그분을 힘입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부디,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퀴즈를 내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큰 꾸중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1). 남의 험담을 하는 사람 2). 험담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 3). 험담을 듣고 있는 사람.

 

험담을 듣고 있는 사람입니다. 듣고 있는 사람만이 악한 말을 멈출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험담을 하는 사람은 이미 나쁘게 말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스스로 제어할 능력이 없습니다. 듣는 사람만이 대화의 흐름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에게 가장 큰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매맞을 사람이 있는데 맞아도 많이 맞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누구의 험담을 듣지 마십시오. 혹 듣게 되면 흐름을 바꾸십시오. 바꾸지 못하면 응분의 책임이 따르게 됩니다.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이는데 첫째는 말하는 당사자입니다. 그는 하느님 눈앞에서 죽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인 말을 싸움 붙이고 욕을 보이고 남들의 사생활에 수군거리는데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죽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주목할지 모르지만, 나중에 결국 자신도 그의 먹이감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를 피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면 결국에는 자신의 가치도 그만큼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험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죽습니다. 사실이냐 아니냐,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떠나서 다른 사람에게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힐 수 있고 그의 명예는 회복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으로 듣는 사람입니다. 험담을 듣는 것은 험담하는 것보다 더 나쁩니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듣기 때문입니다.

 

남을 험담하고 깎아내리며 자기 자랑을 하여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시기와 질투, 이기심을 멀리하여 겸손으로 의로움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랑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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