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나해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회개: 병신 여우짓은 그만두고 호랑이를 본받는 것> 복음: 루카 10,13-16
하느님의 아들이며 말씀이신 그리스도
(1540-1550), 모스크바 크레믈린 Cathedral of the Sleeper |
삶의 궁핍함과 어려움에 지쳐 무작정 숲속을 거닐던 사나이가 다리 잃은 여우를 보았습니다. ‘저래서 어떻게 살아있을까?’ 이렇게 궁금해하고 있는데, 호랑이가 사냥한 먹이를 물고 들어와서는 실컷 먹고도 여우가 먹을 고기를 남겨 놓는 것이었습니다. 이튿날도 같은 방식으로 하느님은 여우를 먹이셨습니다. 사나이는 믿음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크신 선의에 깊이 탄복하며 주님을 찬미했습니다. ‘하느님은 저런 여우도 살리시는 분이시구나. 하물며 당신을 믿는 나야 얼마나 잘 먹이시겠나. 지금까지 먹고 살 걱정만 하며 살아온 내가 부끄럽구나.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사나이는 여러 날을 주님의 섭리에 맡기며 앉아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굶주림에 지쳐 죽어가며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그때 문득 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 거짓의 길에 들어선 자야. 참을 향해 눈을 떠라! 병신 여우 흉내랑은 그만두고 호랑이를 본받아라.”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시어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은 그분의 기적들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은총만 바라고 예수님을 본받으려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회개란 받기만 하는 존재라는 처지에서 나도 예수님처럼 내어줄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성공적인 학자이자 신학자였지만 자신의 감정적, 영적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특히 자신의 불안감과 내면의 혼란을 고려할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지원에 압도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그에게 보여준 사랑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꼈고, 이에 따라 영적인 불균형이 생겼습니다. 나우웬의 심오한 마음의 변화는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 그림을 접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나우웬은 아버지와 함께 있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형에게서 자기 모습을 봅니다. 동생처럼 회개하고 아버지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양심은 받은 것에 보답할 때 자유로워집니다. 사실 지금까지 받기만 하였지, 보답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랑을 수동적으로 받는 사람(결코 완전히 갚을 수 없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끼며)에서 적극적으로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바뀔 때만 자신의 영혼이 진정한 치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과 수용에 대한 나우웬의 이해의 변화는 그가 자신의 권위 있는 학문적, 신학적 경력을 뒤로하고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인 라르쉬(L'Arche)에서 살고 일하기로 결정한 데서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서 나우웬은 어떤 세상적인 방법으로도 자신에게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며 평안을 찾았습니다. 장애인을 섬기면서 그는 사랑은 거래가 아니라 사랑받을 가치가 있거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 아니라 사심 없이 사랑을 주는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닉 부이치치도 여덟 살 이후로 손과 발이 없는 것에 좌절하여 자살을 세 번씩이나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희망 전도사로 청년들에게 용기를 주는 강사로 살아가면서 이미 받은 것이 많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부족하게 받았다고 여기는 사람에서 갚아나는 삶을 사는 삶으로의 변화입니다. 은총을 받으면서도 끝내 이런 회개가 이뤄지지 않으면 마지막 때에 오늘 멸망을 예고한 도시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