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제27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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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4-10-05 | 조회수314 | 추천수4 | 반대(0) |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님이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저는 부모님이 모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아버님은 2011년에, 어머님은 2020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에게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기에 신앙 안에서 저는 부모님과 함께 하니 기쁨입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니,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은 모두 한 가족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군자삼락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는 똑똑한 제자를 만나 가르치는 것입니다. 인간이 높은 문화와 문명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부모와 자식, 세대와 세대가 경험과 지식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가르치셨습니다. 사제의 직분 중에는 ‘가르치는 직무’가 있습니다. 저는 예비자 교리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였고, 강론을 통해서 말씀을 선포하였고,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쳤습니다. 주일학교 교사의 노래 중에 ‘가르치면서 배우게 하소서’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신앙인은 모두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화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멀리서 친구가 찾아와서 함께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뉴욕에 있을 때는 멀리서 신부님들이 제가 있는 신문사를 찾아왔습니다. 저를 보고 싶어서도 있지만, 뉴욕이라는 도시가 주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유럽에서 공부하는 사제들도 왔습니다. 한국에서 안식년 하는 사제들도 왔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사제들도 왔습니다. 자녀들이 뉴욕에서 공부하는 교우들도 왔습니다. 신문사는 마치 손님들이 머무는 사랑방 같았습니다. 손님들이 오면 맨해튼 구경도 가고, 뮤지컬도 보고, 가을이면 단풍 구경도 갔습니다. 지난 2월에 달라스로 왔습니다. 제가 온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지만 오겠다는 손님도 없었습니다. 달라스의 여름이 워낙 덥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을이 시작되면서 10월에는 손님이 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있던 신문사의 후임 신부님이 신문 홍보를 위해 왔습니다. 모처럼 뉴욕의 이야기를 들으니 반가웠습니다. 한국에서 동창 신부님이 2주일 정도 온다고 합니다. 5년 동안 달라스에서 사목했던 전임 신부님도 1달 정도 온다고 합니다. 12월에도 손님들이 오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힘든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명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그러니 나에게 와서 쉬어라.” 벗들이 와서 쉬어갈 수 있다면 제게도 기쁨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시는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인생의 참된 기쁨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전에 명동거리를 걸을 때입니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가는 연인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신발에 껌이 묻었던지, 남자에게 이야기 합니다. 신발에 껌이 묻었네. 남자는 기꺼이 무릎을 꿇고서 사랑하는 여인의 신을 벗겨서 신발에 묻은 껌을 떼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발에 신을 신겨주고, 다시 다정한 모습으로 길을 걸어갔습니다.’ 가을바람이 따듯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랑하기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고, 신발에 묻은 껌을 기꺼이 떼어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배우자들께서도 아마 그러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여동생과 함께 시골 외할머니 댁엘 갔었습니다. 외할머니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셨고, 저는 시골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고추, 마늘, 깨를 보자기에 담아 주셨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그 짐들은 모두 어머니가 양손에 들고, 오셨습니다. 아버님은 담배를 하나 들고 길을 걸으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그런 것을 들면 안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짐을 들지는 않으셨지만 아버님께서도 어머니를 사랑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지극한 정성으로 아버님을 대하셨습니다. 아버님도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어머니를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부부는 무엇, 무엇 때문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살아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신발에 묻은 껌을 떼어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짐을 대신 들어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은 꼭 부부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바로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주려고 할 때, 가정은 생명이 넘쳐나는 갈릴래아 호수처럼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부부가 서로에게 받으려고 한다면 가정은 생명이 살 수 없는 사해(死海)처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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