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루카 복음은 기도의 교과서라고도 불립니다. 루카 복음에 드러난 많은 단락에서, 예수님은 밤이 되면 홀로 외딴 곳에서 홀로 늘 아버지께 기도하셨으며, 이를 바탕으로 낮 동안 여러 고을을 다니시며 하느님의 뜻을 말씀으로 행동으로 표현하고 표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삶의 이중적 운동은 바로 기도와 사랑이었습니다. 기도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끊임없이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도가 하느님 사랑의 들숨이었다면, 이웃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날숨과 같습니다. 기도와 사랑은 예수님의 존재와 삶 자체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11,1)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눈에 늘 기도하신 스승의 모습에서 그들 또한 기도의 필요성을 느꼈고 또한 예전의 스승이었던 요한에게서 기도의 중요성을 들었기에,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11,1)라고 청합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참된 기도를 배울 수 있도록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그 어떤 사람’이 참으로 고맙게 생각됩니다. 그렇게 느끼시지 않나요. 좋은 질문, 필요한 질문을 던진 ‘그 어떤 사람’의 간절한 요구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 아빠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완전하고 올바른 기도를 배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하라, 고 말씀하셨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영광과 찬미의 기도를 바치라기보다, 오히려 역경과 시련에 직면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점이 특이합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마태5,44), “그 일(재난)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마르13,18),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루22,40) 그 까닭인즉 그런 때야말로 우리는 자기 자녀들을 악에 희생시키고 싶지 않으신, 하늘에 계신 자비로운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인식해야 하는 순간이기에 그렇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7~11) 이는 곧 예수님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기도하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는 악의 권세를 극복할 수 없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결코 아무것도 악한 결과를 낳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에 관해 가르치고자 한 핵심은 바로 우리가 빌 수 있고 또 빌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을 청하는 것이며, 이 영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라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알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른 표현으로 우리가 빌 수 있고 또 빌어야 하는 것은 필경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밖에 다른 기도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기도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유일한 기도이며 최종적인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비록 짧지만, 짧은 만큼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기에,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결국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갈망에 대한 응답이며.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입니다.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