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예수님께서 손수 주신 기도 / 연중 제27주간 수요일(루카 11,1-4)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10월 9일 / 카톡 신부 | |||
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10-08 | 조회수79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예수님께서 손수 주신 기도 / 연중 제27주간 수요일(루카 11,1-4) 우루과이의 어느 작은 성당 벽에 이런 기도 글이 적혀 있다. 이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주님의 기도와는 동떨어진 행동을 하며 사는지를 마음 깊이 깨달을 수가 있을 게다. 그 실제내용이다. 너희는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하지 마라. <늘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말하지 마라. <늘 혼자만을 생각하면서> ‘아버지’라고 말하지 마라. <한 번도 아들딸로 산 적이 없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말하지 마라. <늘 자기 이름 빛내려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말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지 마라. <늘 내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주님, 요한이 가르친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걸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 나라가 오게 하소서. 매일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어쩜 이 ‘주님의 기도’만큼 단순하고 위대한 기도는 아마도 없을 게다. 서슬 시퍼런 율법 시대에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그것은 모르긴 몰라도 거의 목숨 내건 행동이었으리라.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란다. 하지만 그분과 대화함을 느끼는 이 과연 몇이나 될지? 자식 놈들은 그냥 ‘엄마, 아빠’를 부른다. 그러면 그들 부모들은 왜 부르는지를 알게다. 몇 마디 하지 않아도 통하게 되어 있다. 애정이 깔려 있기에.
오늘을 사는 믿음의 생활을 하는 우리는, 그 어떤 기도보다도 이 주님의 기도를 자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일용할 양식을 수시로 걱정하고,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로 뚜렷이 느끼지를 못하는 것 같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저 막연한 마음으로만 기도를 하는 탓이 아닌지? 정녕 이 기도에 담긴 참뜻을 깨닫는다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까닭을 당연 이해하리라. 그러기에 기도할 때마다, 이 기도는 오직 주님의 것이란 것을! 주님의 기도, 이 기도는 제자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그분께서 손수 가르쳐 준 것임을 단단히 기억하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