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하느님 말씀 지키는 이들이 더 행복 / 연중 제27주간 토요일(루카 11,27-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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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10-11 | 조회수61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하느님 말씀 지키는 이들이 더 행복 / 연중 제27주간 토요일(루카 11,27-28) 한 자매가 갑자기 푸념을 하면서 한숨을 길게 한다. “남의 자식은 일류 대학에 잘도 가고 좋은 직업 얻어 시집 장가 잘도 가는데 우리 자식은 왜 이 모양인지. 저런 자식 하나두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니 늘 약이 오릅니다.” 이런 마음은 부모라라면 다 갖는 공통된 것일 게다. 자식 속 썩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 좋은 직장에 혼인 잘하면 남부럽지 않아 더 바랄 게 없다. 사실 이런 능력을 떨치는 자식을 둔 보고는, 여타 모든 부모는 그 가정사를 보고는 겉으로는 그래도 내심은 모르긴 몰라도 쾌나 부러움의 대상으로 삼게 될게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어떤 여자가,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더 행복하다.”’ 어쩌면 자기 것보다 남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처럼, 남의 자식이 겉으로는 성공의 길을 달리는 것 같아도, 그들 부모가 안은 남모르는 고통이 오히려 더 클 때가. 그러니 세상눈으로 자녀를 보며 일희일비를 말자. 한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눈에 보이는 게 아닐 게다. 그러니 자식 돈 잘 벌고 잘살기만을 꼭 바라기보다, 올바른 가치관과 신앙심으로 살도록 기도를 드리자. 우리는 세계화란 이름으로 하나의 인류를 꿈꾸지만, 여전히 특권 의식에 빠지곤 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신앙이 우리를 사로잡는 힘은 예수님 말씀과 삶을 통해 선포된 하느님 사랑이다. 이것이 어느 특정 계층에게만 하느님 구원의 주어졌다는 편견을 갖지 말자. 우리는 오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만,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당신 백성으로 초대하신다고 확신해야 한다. 바오로 사도도 하느님 나라의 이런 보편성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라고 강력하게 선포를 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불효란다. 그래서 그 죽음을 알리지 않고 가슴이 미어져도 소문 없이 묻는다나.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치고 절망에 젖지 않는 이는 없을게다. 더구나 그 자식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때는, 앞이 더욱 캄캄할 수밖에. 성모님도 예수님의 슬픈 죽음을 목격하셨다. 이렇게 성모님께서는 누구보다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셨다. 한없는 슬픔과 분노를 안으시면서 성모님은 아드님의 죽음을 존중하고 조용히 받아들이셨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는 한 여인의 탄복은 성모님이 살아 계실 때부터 이미 만인의 어머니로 칭송받으셨음을 드러낸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낳고 기른 인간적 인연보다 더 높은 행복의 길을 제시하셨다. 당신을 통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써, 구원의 길을 선택한 이들이 진정 행복하다고 가르치면서. 이는 언뜻 자신이 갖지 못한 부러움을 토로하는 우리의 목소리로 들리는 것은 나보다 나은 이를 칭송하기보다 시기하는 모순된 이 세상에 묻힌 또 다른 나의 얼굴이 아닐까 되돌아본다. 따라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더 행복하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우리에게 신앙의 보편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성모님께서는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로 정의되는 신앙인들의 모범이시다. 우리 역시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인 믿음의 사람이다. 성모님을 따라 주님 말씀 의지하고 복음을 실천함으로써 행복의 그 길을 찾아야만 하겠다. 또한 예수님을 낳은 모성과 젖을 먹인 세월에, 예수님만을 새기신 성모님의 참 모습이 스며온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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