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8주일 나해, 군인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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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10-13 | 조회수154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연중 제28주일 나해, 군인주일] 마르 10,17-30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최희준씨가 부른 <하숙생>이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이 노래에는 우리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닮겨 있지요. 즉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겁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과 명예, 권력을 누리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 세상을 떠나 죽음 이후의 삶으로 넘어갈 때에는 그것들을 싸들고 갈 수 없으며 철저히 ‘빈 손’으로 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라도 더 많이 가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우리들입니다. 재물이 가져다주는 좋은 몫을 제대로, 온전히 누리려면 그것을 어느 곳간에 쌓아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곳간에 쌓아놓은 재물은 벌레가 좀먹고 녹이 슬어 언젠가 사라져버리지만, 하늘의 곳간에 사랑으로 쌓아놓은 재물은 하느님의 자비와 보호에 힘 입어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을 겁니다. 그러니 영원토록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려면 하늘 곳간에 열심히 재물을 쌓아야겠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유한 청년은 그런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한 듯 합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많은 재물 덕분에 부족함 같은건 모른채, 원하는 것들을 다 누리며 아주 풍족한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기에 특별히 더 원하는 것도 없었겠지요.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자기가 지금 누리는 그 좋은 것들을 아주 오랜 시간동안 누리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가 생각하는 ‘영원한 생명’이란 지금의 상태가 영원토록 쭉 이어지는 것이었지요. 세상의 귀하고 좋은 것들은 그만큼의 가치를 지불하면 내 것이 되는 것처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도 일정 수준의 가치만 지불하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여겼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고 집착하는 재물을 더 오래 누리기 위해 필요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지향하고 바라야 할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음을 믿는 것이며, 그런 믿음을 지니고 예수님의 말씀과 계명들을 충실히 실천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중요한 계명들을 알려주시면서 그것들을 잘 지키라고 권고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그것을 주신 목적과 뜻을 헤아리며, 그 근본정신인 사랑이 드러나도록 제대로 실천한다면 그 실천을 통해 하느님과 나 사이의 사랑이 더 깊어져 하나로 일치될 것이며, 그 일치를 통해 그분께서 누리시는 영광과 기쁨을 나도 함께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 부유한 젊은이는 자신이 그런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잘 지켜오고 있노라고 대답합니다. 단지 ‘계명을 어기지 않았음’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는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계명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실천했는가’를 기준으로 한다면 얘기가 다르지요. 계명을 잘 지키려고 노력을 하긴 하는데 마음이 항상 재물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계명 쪽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긴 하는데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지는 못하고, 이웃을 사랑하긴 하는데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조건 없이 제한 없이 하지는 못하는 겁니다. 그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지옥에는 가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천국행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요. 연옥을 넘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고 싶다면 자꾸만 재물 쪽으로 기울어지고 집착하는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과 이웃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당신 뒤를 따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귀한 보물과도 같은 참된 기쁨과 행복을 영원토록 누리게 될 거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평생을 재물이 주는 풍족함과 안락함을 누리며 살아온 그에게 재물을 포기하라는 요구는 삶을 포기하라는 말로 들렸을 겁니다. 그건 결코 그가 원한게 아니지요. 영원한 생명을 도구로 삼아 자기가 보물처럼 여기는 재물을 더 오랫동안 누리고 싶었을 뿐,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정확히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하늘의 보물’을 얻기 위해 자기 삶의 ‘전부’와도 같은 재물을 걸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안타깝지만 눈물을 머금고 영원한 생명 얻는 일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지요. 우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영원한 생명처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귀하고 소중한 가치들을 얻어 누리려면 먼저 내 손에 움켜쥐고 있는, 마음으로 집착하고 있는 세상의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 주님께서 들어오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내 가난한 마음을 구원의 진리로, 큰 사랑과 자비로 가득 채워주시어 우리가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나를 따라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과 함께 누리는 기쁨이 세상이 주는 그 어떤 기쁨보다 더 컸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다다르게 될 하느님 나라가 세상이 주는 그 어떤 보물보다 더 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청년은 ‘나를 따라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슬퍼하며 그분을 떠나갔습니다. 그에게는 재물이 주는 기쁨이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보다 더 컸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세상이 주는 보물이 ‘하늘나라’보다 더 귀하고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겁니다. 하느님께서 그 문을 너무 좁게 만드셔서가 아니라, 내 영혼이 세상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으로 너무 비대해져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 부유한 청년에게 권고하신대로 내가 가진 것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베풀고 나누며 사랑을 충실히 실천해야겠습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재물을 많이 모으는데에 있는게 아니라,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는데에 있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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