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영근 신부님_“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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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10-16 | 조회수128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 오늘의 말씀(10/16) :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 제1독서 : 갈라 5,18-25 * 복음 : 루가 11, 42-46 42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43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44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45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46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오늘의 강론>
예수님께서는 앞 장면에서 정결법의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밝혀주셨습니다. 이어서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에게 여섯 가지 ‘불행선언’을 통하여 신랄하게 질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중에서 바리사이들에 대한 세 가지와 율법 교사들에 대한 한 가지를 들려줍니다. <첫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십일조는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
이는 십일조의 율법준수를 부정하거나 율법준수를 질책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결여된 율법준수를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레위기(27,30-33)와 신명기(14,22-29)에 따르면, 주요 곡식과 가축의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이를 더 세분화하여 뗄 나무에까지 십일조를 적용할 만큼 율법준수에는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고 철저하고 엄격했지만, 율법의 정신인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을 행하는 일을 실천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열성은 좋지만, 그릇된 열성은 오히려 위험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 위에 서 있는 열성이어야 합니다. 곧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보다, 그 정신인 의로움과 사랑을 행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 11,43)
사람들이 그들에게 윗자리를 내어주고 먼저 인사하는 것은 존경의 표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맡은 바 종교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특권적 우월의식과 교만한 과시욕에 몰두했었나 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의 특권의식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사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윗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 합당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존경받기보다 존경하고, 인사받기보다 인사하고, 섬기받기보다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드러나지 않은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으면서 무덤인 줄을 모른다.”(루카 11,44)
민수기(19,16)에 따르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하기 때문에 회칠하여 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불결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마치 표시하지 않은 무덤처럼, 자신의 부패를 은폐시키고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사실, 악보다 더 추악한 것은 마치 선인 양 자신의 얼굴을 꾸미고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된 선일 것입니다. <네 번째> 불행 선언은 율법 교사들에 대한 것입니다. “너희 율법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가 11,46)
율법 교사들의 언행의 불일치에 대한 질타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을 실행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는 짐을 지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보다도 조상들의 전통과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존중했고, 그것을 지나치게 세분화하여 모세의 율법 외에도 613개의 규범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결국, 백성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짐을 지워놓으면서도 자신들은 스스로 지키지는 못했던 것입니다(마태 23,3). 사실,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은 그 당시의 종교적 길잡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까지도 파멸로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이요, 신앙의 참된 길잡이로 살아가라는 강력한 경각심을 일깨워줍니다. 아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
주님! 제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당신을 믿으면서도 의로움과 사랑을 행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불의와 부패 속에서 행복이 있을 수 없고, 무관심과 냉대 속에도 행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당신 뜻을 행함으로 진정한 행복을 얻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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