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11,51) 논어 「태백편泰伯編」에 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선비는 견식이 넓고, 의지가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선비의 소임은 무겁고 가야 할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仁을 실현시키는 것이 선비의 소임이니 그보다 더 무거운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죽을 때까지 걸어야 할 것이니 그보다 더 먼 것이 또 있겠는가?』 여기서 ‘任重道遠임중도원’은 맡겨진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 는 뜻으로 증자의 이 말은 공자의 가르침이며 유가의 가르침의 핵심인 인仁을 실현시키는 것을 학문하는 선비의 평생 소임으로 삼아야 함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들이 자신들에게 위임된 율법의 핵심인 하느님의 ‘헤세드hesed: 불변의 사랑, 호의, 인자 자비 등, 창47:29; 신7:9; 미 7:20’를 실현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맡겨진 막중한 소임을 충실히 살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하여라!, 고 선언합니다. 그 소임에 충실하지 않은 일의 책임을 물어서 “너희는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11,51)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단적인 불성실한 무책임의 실례가 바로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11,52)라는 말씀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율법 교사들의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죄가 참으로 작지 않고 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인즉, 그들은 단지 “예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무덤을 만들었을 뿐”(11,48)만 아니라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것을 독점하고 있으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지식의 열쇠를 감춰버리고, 자신들만이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도 막아 버린 우매한 행동을 하고 있음에도 이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무슨 해괴한 일입니까? 문을 열어주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이들이 오히려 들어가지 못하도록 문을 닫아버렸으니 말입니다. 자신들의 조상들이 듣기 싫고 부담스럽다고 예언자들을 배척하고 죽였던 것처럼, 그런 무지에서 비롯된 어리석음의 죄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지식의 열쇠’란 율법을 해석하는 열쇠를 의미하지만, 이는 천국 문을 여실 그리스도라는 열쇠를 말하는 것입니다. 묵시록에서 요한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이, 진실한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3,7) 그렇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지식의 열쇠’는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주님만이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율법 교사들은 예언서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 오심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숨기고 부정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율법의 열쇠인 그리스도를 치워 버리고(=숨기고) 자신들은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고 믿으려 하지도 않았으며, 또 들어가려는 문을 닫아버렸기에 곧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나라로 들어가려는 이들을 막았기에 예수님께서 이토록 질책을 율법 교사들에게 쏟아 내신 것입니다. 이는 당대의 식자들과 기득권 세력들만이 자행했던 무지와 어리석음의 죄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 역사 안에서 반복되고 있는 무지와 그로 인한 어리석은 역사의 아픔과 상처를 우리는 겪고 있습니다. 어느 때든지 가장 우매하고 어리석고 유치한 부류가 바로 스스로 안다고 자부하는 종교인들과 정치가들이며 이들의 오만과 자만의 결과물과 그 무거운 짐은 언제나 힘없고 무죄한 소시민, 대다수 국민의 몫입니다.
오늘 복음 ‘이 세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의 무게를 저 또한 느낍니다. 저 역시도 과거의 불편한 유산에 대한 책임 의식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은 일차적으로 반민 특위 활동을 방해하였고, 특히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통해 친일 잔재 세력 청산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보상은 받았지만, 배상을 포기’했었습니다. 그러나 늦은 감은 없지 않지만, 대법원의 판결로 이를 번복하고 배상 책임이 일본의 기업에 있다고 판결하였죠. 그런데 『 일본에 대한 한국의 배상 청구권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소멸되었기 때문에,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국가 간 약속을 위배한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국가를 우방으로 대우할 수 없다.』는 아베의 망언과 이런 논거에 근거해서 경제 보복을 단행함으로써 수면 아래 침잠되어있던 한일 과거사 문제가 촉발되었습니다. 한일 과거사는 단지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기에,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바람직한 한일관계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과거 기성세대가 해결하지 못한 과거사를 확실히 바로잡아야 합니다. 과거 경제 부흥과 성장에 급급해서 ‘일본의 강제 징용에 대한 배상과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사죄’에 대해서 암묵적으로 외면하고 방치해 온 과거 정치 지도자의 침묵의 죄가 큼을 명심해서 ‘과거사 정리와 매듭’을 풀 수 있는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에게 ‘맡겨진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겠지만’ 이 나라의 의식 있는 모든 국민의 성원과 열망에 힘입어 지혜롭게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고 행동해 나가길 바랍니다. “주님, 과거가 현재에 넘겨진 문제 앞에 우리 모두 침묵하지 않고 무관심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시고, 문제의식과 책임의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를 흔들어 깨워 주십시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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