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양심을 저버리는 그 어떤 불의에도 / 연중 제28주간 목요일(루카 11,47-5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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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10-16 | 조회수82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양심을 저버리는 그 어떤 불의에도 / 연중 제28주간 목요일(루카 11,47-54) 살다보면 억울하게 오해받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걸로 앙심과 보복이 떠오른다면 조용히 극복해야 할 게다. 감정에 휩쓸리면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로 돌아간다. 인내와 기도로써 ‘주님 뜻’을 헤아리려 애쓴다면 ‘예수님 닮는 행동’이 된다. 내 인생을 떠받칠 ‘십자가를 지는 행위’가 되리라. 허나 모르면 엉뚱하게 대한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도 예수님을 몰랐기에 앙심으로 옭아매 곤경에 빠뜨렸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을, 망가뜨리러 오신 분으로 여겼기에.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그대로 하니, 너희는 동조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갈 이들조차 막았다.” 예나지금이나 역사적으로 하느님 말씀을 전하던 그 많은 예언자는 사회의 지도자들과 대항해 싸워야 했고 더러는 맞서야 했기에 언제나 그들만의 수난을 겪었다. 하느님 말씀과 세상 욕심이 가는 곳마다 충돌했기에. 오늘 우리 교회 모습이다. 이처럼 교회가 예언자 직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으면, 더 이상 하느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게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끝내 꾸짖으신다. 이렇게 거짓 예언자들에게 당당히 맞섰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들었다. 이러한 바리사이들의 태도와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이렇게 예수님을 그들처럼 죽음으로 내몰지 않았을까 생각하곤 한다. 글쎄다. 과연 그럴 수가 있었을까? “나에게 옳은 말을 해 주는 이를 어떻게 과연 맞섰는가? 진리 편에서 사회 정의와 공동선을 부르짖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가톨릭 사회교리 가르침을 실천하는가?” 어쩜 예수님께서 이 시대에도 거부와 박해를 당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양심을 지키고 옳은 일에 굶주리며 정의에 앞장서고, 진리를 외치며 불의와 맞설 수 있는 용기는 아무나 갖지 못한다고 볼 수도 있다. 막상 내게 닥칠 위협이나 보복을 생각하면 차라리 무관심하거나, 내 할 일만 잘하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기에. 그러기에 어쩌면 있어야할 이런 정의가 사라지기에, 다소 불안한 조직이 되기도 한다. 신앙인들도 이런 예언자의 주장인 ‘진리와 정의’의 삶을 가끔은 피하려하기에 악한 기운이 교회를 떠나지 않는다.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은 우리 신앙인을 개별적 인격체로 바라보기보다는 교회를 대표해 신앙을 보여 주는 이들로 여긴다. 그래서 그것이 잘못이라 보기보다 우리 각자가 믿는 신앙과 몸담고 있는 교회를 대표하는 이로서 처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혹여 우리의 행실이나 태도가 사람들을 잘못으로 이끈다면, 우리 또한 주님의 이런 꾸중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이처럼 진리 앞에 용기를 지녀 권력에 자신만의 그 강직한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자유와 인권을 위해 헌신적인 이들이 참 많이 있다. 그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정의에 대한 당신 가르침을 심어 주시기에. 어쩜 그들도 예수님처럼 수난을 받을지라도. 예수님은 당신 죽음을 직감하셨지만 타협하지 않으시고 당신 일만을 꿋꿋이 하셨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때로는 오해 속에서 양심을 저버리는 그 어떠한 불의에도, 그 옛날 예수님마냥 당당히 맞서가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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