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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선교의 기본이자 시작: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 이름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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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백봉7 쪽지 캡슐 작성일2024-10-19 조회수163 추천수2 반대(0) 신고

 

 

 

 

 

  

 

 

2024년 나해 연중 제29주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

 

 

 

<선교의 기본이자 시작: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 이름 말하기>

 

 

 

복음: 마태오 28,16-20

 

 

 


LORENZETTI, Pietro 작, (1325)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시며 선교 사명을 주십니다. 그런 이들에게 당신께서 함께하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선교는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이자 명령입니다. 선교하지 않으면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선교는 곧 사랑 실천입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강이 불어난 곳의 다리를 집에서 창문으로 보다가 다리가 끊기게 될 것 같아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재빨리 나가 차량을 통제한 적이 있습니다. 한 차량이 반대쪽에서 오자 손을 엑스자로 그리며 차를 막아섰고 그 차가 멈추었을 때 바로 그 앞에서 다리가 무너졌습니다. 이 사람이 집에서 TV만 보고 있었다면 과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곧 하느님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요? 예언자직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예언자직의 끝은 무엇일까요? 죽음입니다. 예수님도 예언자직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떤 가수가 공연하는데 사람들이 야유하며 다 떠나버린다면 마음이 어떨까요?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워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더는 가수가 아닐 것입니다. 사제가 강론이 두려워 미사를 꺼린다면 주님께 사제로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선교의 가장 큰 적은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미국 네브래스카주 한 시골 목장에 사는 12살 소년 ‘로건’이 휴스턴에 있는 크리스천 라디오 방송국에 전화해서 진행자인 마이크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소년은 울먹였습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아끼던 송아지가 몸이 약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전화한 것은 그 슬픔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왜 자신이 아끼던 송아지를 데려가셨는지 물었을 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로건, 내 아들도 나에게 소중했단다. 하지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어야 했어.”

로건은 누구든 자신이 아끼는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항상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용기가 없는 이유는 하느님 체험이 없어서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은 한 번쯤 나가게 만드는 마중물에 불과합니다. 지속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먼저 한 번이라도 자신의 체험을 전하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개신교에서 전교로 유명한 분 중의 하나가 ‘고구마 전도왕 김기동 목사’입니다. 그가 목사가 되기 전에 아내와 딸이 주일에 교회를 가지 못하게 하고 스키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사고가 크게 났고 불교 신자였지만, 하느님께 기도하여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목사님께 전도 연습으로 끌려 나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기도 중에 고구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사람들을 고구마로 보는 것입니다. 전도란 그저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찔러 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믿으십니까?”, “그래도 믿으셔야 합니다.”, “믿으면 참 좋아요.”,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네 마디를 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 믿으십니까?”입니다. “교회 다니십니까?”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와야 그다음이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8)라고 하십니다. 

 

 

    저도 한 선교왕을 아는데, 그분은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마다 “찬미 예수님!”을 합니다. 그런데도 1년에 30명씩 성당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예수님 이름에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선교하지 못해도 마음이 뿌듯하다고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으니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어떤 집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합니다. 먹을 것을 좀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욕을 먹고 매를 맞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찬미 예수님!”은 강론 전이나 어머니와 통화할 때 정도만 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모든 사람에게 인사할 때 예수님의 이름이 나오게 할 결심을 해 봅니다. 신자들과 길거리 선교를 할 생각도 있습니다. 그저 “찬미 예수님!”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 입에서 누구 앞에서건 예수님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하는 것, 이것이 선교의 시작일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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