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변화의 불을 지펴 평화를 / 연중 제29주간 목요일(루카 12,49-5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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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10-23 | 조회수8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변화의 불을 지펴 평화를 / 연중 제29주간 목요일(루카 12,49-53)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주님은 분열은 물론 불을 지르러 오셨단다. 불은 어지러운 세상을 정화하는 역할을 하리라. 불은 주님과 세상 것을 걸러낸다. 주님을 따르는 이는 세상 것에는 죽지만, 주님 것에는 늘 사니까. 예수님께서는 위로와 치유에 목마른 우리에게 오히려 이 세상에 활활 타오르는 불을 지르겠단다. 분열과 갈등, 반목에 지친 한순간을 화해로 이끌어 주시기는커녕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니, 도대체 이게 어인 말인가? 과연 내 안에서 타올라야 하는 건 과연 무엇일까? 혹시 행복과 평화라는 거짓 명목으로, 스스로의 삶을 무덤처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믿음은 신뢰이기에 주님만을 믿고 따르는 거다.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좋은 쪽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희망이다. 어떤 필요한 모임이라도 이에 방해된다면 접어야 한다. 중요한 이라도 그분 사랑에 여러모로 걸림돌이라면 눈 딱 감고 걷어차 달리 처신하자. 예수님은 가족도 엄밀히 말해 박해자가 된다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렇다. 그 불은 분명 그 어떤 변화이다.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닌, 내가 바뀌는 변화이다. 그러면 바뀐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게다. 사실 우리 모두는 가족에 대해선 마음으로 통하는 혈육의 정을 갖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안으면서도 승화하라신다. 되레 그게 주님께로 가는 데 방해가 되니, 그리 집착해서는 안 된단다. 그러기에 의연하게 맞서라는 거다. 그렇다고 싸우라는 건 아니다. 변화의 불을 지펴 집착의 끈을 놓으라셨다. 그 불씨로 평화를 찾으라신다. 그것이 당신 사랑이라신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는 반드시 크고 작은 갈등과 어려움은 물론, 많은 시련과 충돌로, 급기야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될지도 모른단다. 그러기에 변화의 불을 지펴 평화를 지필 수 있도록 외롭고 고독한 길도 마다하지 않을 크나큰 은총과 용기를 주시도록 이 시각 마음을 모아 정성으로 기도를 드리자. 불은 이기심과 무사안일을 태우고 정화시켜 사랑이 타오르게 만든다. 사실 불로 분열을 이끈다는 것은 죽어 있는 가슴속의 갈망을 다시 샘솟게 하는 약속일 게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참 생명을 체험하는 길이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직면하신 당면한 고통은 표적이 아닌, 오히려 당신께 무관심한 것일 게다. 우리는 그분을 멀리한다. 열심히 기도하고 묵상하지만, 그분을 영화에서처럼 감상적이거나 비극적인 주인공처럼 만난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을 받아들일 것인지, 않을지의 입장을 취해야만 한다. 이런 분열이 마지막 때를 특징짓고, 개개인들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은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큰 도전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회개하고 변화되어야 한다고 일깨워 주기에. 그러기에 그 신앙을 뜨겁게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의 기도가 일상의 갈등에서 정도를 벗어나 비껴간다면, 우리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고립되고, 우리가 선택한 신앙은 우리의 삶에서 멀리 유리되리라. 우리가 기도만으로 고통에서 도피하여 평화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예수님 실상이 아닌, 환상의 예수님을 찾는 것이리라. 진정 그분께서는 이곳에 불을 지르러 오신 분이시니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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