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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수철 신부님_개안(開眼)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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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10-27 조회수136 추천수9 반대(0) 신고

 

“주님과의 살아있는 만남이 답이다”

 

 

오늘 복음은 복음서의 요약과 같습니다. 상징들로 풍부하며 복음의 위치도 아주 적절합니다. 예루살렘 상경 여정중에 일어난 일이며 이어지는 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또 오늘 복음 앞에는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가 있었으니,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정은 십자가의 길, 여정임을,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는 파스카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오늘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신 일화 바로 앞의 일화입니다. 두 경우의 대조가 참 극명합니다. 앞서 제베데오의 두 아들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제가 볼 때 철부지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직제자들의 내적 수준이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실망이 참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와의 만남은 참 신선합니다. ‘길가에 앉아 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눈먼 거지 바르테매오’는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가난한 인간 실존을 상징하는 듯 강열한 느낌을 줍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우리는 모두 ‘길가에 앉아 길이신 주님을 찾고 기다리는 눈먼 거지’일 수 있습니다.

 

눈먼 거지였지만 영혼의 눈은 주님을 찾는 열망으로 환히 열려 있던 바르티매오였습니다. 꼭 기억해야 할 이름,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자 전광석화, 응답하는 바르티매오입니다. 주님을 찾는 열정의 반영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참으로 절박한 가난하고 겸손한 이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바칠 단 하나의 기도가 있다면 이런 자비송뿐입니다. 이런 자비송으로 미사전례를 시작한 우리들입니다. 바로 바르티매오와 같은 열망으로 미사참례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바르티매오의 영적 통찰력이 놀랍습니다.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영혼의 눈은 활짝 열려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히브리서가 잘 설명해줍니다. 사람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아들인 분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는’ 대사제가 되신 예수님이요, 하느님께서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나를 낳았노라.”하고 인정하신 분입니다. 참으로 바르티매오의 영적 통찰은 정확했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부르짖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간절히 열렬히 찾아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이것은 올바른 충고가 아닙니다.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자비송 기도를 바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르티매오의 간절한 자비송 기도에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말씀하십니다. 만류하며 방해하던 이들이 우군이 되어 그를 격려하는 말마디도 은혜롭습니다. 그대로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 각자에 대한 말마디처럼 들립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용기를 내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자주 쓰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일어나라는 말씀은 부활을 상징합니다. 운명론적 체념을 떨쳐 버리고 ‘분연히 일어나 다시 부활의 새생명을 살라’는 절호의 구원의 순간입니다. 

 

그는 숙명의 사슬과 같은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가니 과거와의 결별과 동시에 부활을 뜻합니다. 그대로 미사장면중 주님을 만난 이들의 내적상태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절정을 이룹니다. 과연 오늘 짧은 복음은 그대로 미니복음서로 복음서의 요약같습니다. 앞서 제베데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 대한 물음과 똑같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시공을 초월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화두같은 영원한 물음입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가 정답을 말했습니다. 삶이 진실하고 간절하고 절박하면 말도 글도 짧고 순수합니다.

 

“스승님 제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앞서 야고보와 요한의 청과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역시 우리가 드릴 소원의 청도 이것 하나뿐일 것입니다. 아마 이 두 형제 제자들이 이 경우를 목격했다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 얼굴을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잠시 10월 한달 저를 행복하게 하는 두 시를 다시 나눕니다. 피정집 자캐오의 집 3층 제의방에서 바라보는 수도원 배경의 가을 불암산 풍경은 참 장관입니다. 눈앞에 가까이 있는 산이 순간 주님처럼 느껴졌고 흡사 주님을 만난듯한 체험을 했습니다. 여기서 태어난, 찾아온 두 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하나의 고백에 이어 엊그제 또 하나의 고백입니다.

 

“늘

 앞에 있는 산

 

 앞에 있는 당신

 

 행복에 삽니다”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을 바라볼 때 마다 ‘살아 있는 주님’을 만나듯 고백하며 되뇌는 두편의 시로 요즘 많이 행복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의 절정이요 제1독서 예레미아 예언의 실현입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가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육신의 눈이 열림이 상징하는 바, 마음의 눈, 영혼의 눈, 믿음의 눈입니다. 저는 지체없이 강론 제목을 ‘개안의 여정’이라 정했습니다. 멀쩡한 육신의 눈을 지녔어도 무지에, 탐욕에 눈먼이들, 눈뜬 맹인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개안의 여정’, 이 복음을 대할 때 마다 늘 정하는 제목입니다. 우리 삶은 계속 눈이 열려가는 개안의 여정이면 좋겠습니다. 육안의 시력은 감퇴해도 영안의 시력은, 심안은 시력은 날로 좋아져야 너그럽고 자유로워지는, 풍요롭고 행복해지는 삶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항 처방이 바로 개안의 여정입니다.

 

개안은 만남입니다.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님과의 만남은 물론 주변 모두를 새롭게 만남입니다. 개안은 회개입니다. 개안과 동시에 이뤄지는 회개입니다. 개안은 깨달음입니다. 눈이 열려가면서 깨달음의 진리들이 뒤따릅니다. 개안은 방향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눈이 열려 주님을 따름으로 희망의 길이 열리고 희망의 방향이 주어졌으니 이제 방황과 표류는 끝났고 희망의 순례자로 살면됩니다. 그러니 개안의 은총은 얼마나 지대한지요! 

 

말그대로 오늘 복음은 예레미야 예언의 실현입니다.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예레미야의 기도가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됩니다. 시편 저자도 화답송을 통해 구원의 기쁨을 함께 합니다. 그대로 바르티매오는 물론 우리의 고백과 기쁨을 대변합니다.

“주님이 큰 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유배후 해방의 기쁨을 맞이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바르티매오와 함께 우리도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며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개안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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