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반영억 신부님_영의 눈을 뜨게 되기를 바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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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10-27 | 조회수85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자비를 입으시길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던 바르티매오의 청을 들어주셨듯이 우리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시리라 믿으며 주님의 사랑으로 영의 눈을 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대학교에 근무할 때 졸업생의 결혼 주례를 몇 차례 하였는데 고 가밀라라는 학생은 시각 장애인과 결혼하였습니다. 일찍부터 봉사활동을 다니다가 장애인 선생님을 만났는데 7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고, 부모님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하였습니다. 자녀 셋을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어제는 아들이 양업고에 합격하였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들의 결혼 주례를 하면서‘육신의 눈보다 영적인 눈을 뜬 배우자를 맞이한 신랑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눈을 뜨도록 만들어 준 신랑의 사랑을 받아들인 신부도 또한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영의 눈을 뜨면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장애는 결코 장애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생각하는 그릇된 편견이 장애일 뿐입니다.
우리 눈을 세상의 현상을 드러난 대로 보는 육의 눈, 속을 헤아리는 마음의 눈, 이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녀야 할 눈은 혜안으로 영적인 눈입니다. 다른 눈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영적인 눈을 지니지 못하면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의 눈을 지니면 모든 것을 소유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이 있고, 남이 나를 바라보는 눈이 있으며 하느님께서 바라보는 눈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내가 만족하고 많은 사람이 인정하더라도 하느님 눈에 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 눈에 꼭 들기를 희망합니다.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하느님의 얼굴이요, 하느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보면,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유다인의 표현으로 자비라는 것은 애간장, 애타는 심정을 말합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이 마음을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11,18)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간장이 녹는 안타까움!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바로 그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자신의 바람을 밝혔을 뿐 아니라 바람을 이뤄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을 큰 소리로 고백한 것입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겉으로 보면 눈먼 사람은 바르티매오였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하면 눈먼 사람은 주변 사람입니다. 이웃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잠자코 있으라”고 외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마르8,18)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위신,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눈먼 거지의 절박한 사정에 공감하며 그를 도왔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영의 눈이 뜨지 못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자기를 낫게 해 줄 분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애타게 불렀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발버둥 치듯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했고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자비를 입었습니다. 이러한 애절함과 믿음의 은총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옛말에 “마음의 바탕이 밝으면 어두운 방에서도 푸른 하늘을 볼 수 있고, 생각이 어두우면 환한 햇빛 속에서도 악마를 만나게 된다”(채근담).고 했습니다. 이웃을 향한 마음이 열려 있고 또 사랑을 하면 우리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에 무관심하면 그 자체가 어둠이요, 그 삶은 악마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고 또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럼에도 사랑을 살지 않는다면 스스로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후 심판의 기준을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31-46).라고 하시며 이웃 사랑의 실천에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으로 눈을 떠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바르티매오를 불러오도록 명하시자 사람들은 태도를 바꿔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에게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합니다. 바르티매오는 그 소리를 듣고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습니다.” 겉옷은 그의 모든 재산입니다. 낮에는 햇빛 가리개요, 던져주는 돈을 받는 돈주머니요, 밤에는 이불입니다. 그를 감싸주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던져 버렸습니다. 이 시점에서 겉옷은 오히려 장애가 될 뿐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지 않고는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유는 늘 없게 마련입니다. 내 것을 희생해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모처럼 맞은 휴일 쉬고 싶지요. 당연합니다. 하고 싶은 것 해야지요. 그래서 돈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촉하시면 일어서야 합니다. 사랑이 나를 부르면 바르티매오처럼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생각하고 말고 할 것이 아닙니다.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 언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꼭 잡으시길 바랍니다.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오늘 착한 목자 수녀회 수녀님들이 오셨는데 기회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간청은 “영적으로 눈 뜨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영으로 눈을 떠서 주님을 본다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영적인 눈을 떠 주님께서 계시는 집과 주님의 영광이 깃드는 곳에 마음을 두고 마침내 주님의 얼굴을 꼭 마주하시면 좋겠습니다. 한 주간, 먼저 내가 눈먼 이라는 것을 깨닫고, 간절함으로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구원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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