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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11.2) 위령의 날: 마태오 5, 1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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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11-01 조회수101 추천수4 반대(0) 신고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모든 성인의 대축일’과 같은 ‘참 행복’ 선언입니다. 예전 베트남에서 돌아온 그해 관구 총회 중, 죽은 도밍고 수사가 자기 나눔의 시간 동안 두서 번에 걸쳐 반복해서 ‘죽고 싶다.’는 표현을 들을 때 참으로 마음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죽고 싶은 심정’을 들게 했었던 것일까라고 생각해 보았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그는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더니만 일찍 외롭게 세상을 떠나 하느님 곁으로 귀천했습니다. 사실 생사生死는, 곧 삶도 죽음도 다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삶을 싫어하여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버리려고 한다면 곧 하느님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집착하는 것 또한 하느님의 생명을 온전히 깨닫고 사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현세의 삶은 그저 지나가 버리면 그만인 임시 거처가 아니며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앞당겨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살아 있는 인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다.”고 성 이레네오는 말합니다. 결국 삶도 죽음도 다 하느님의 생명이라면, 살고 있는 곳이 이승이든 저승이든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며 그 곳에서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전 친정 엄마 돌아가신 다음, 꿈속에서 엄마를 만났고 그래서 엄마에게 물었죠. “엄마 거긴 어때?”라고, 그러자 제 엄마 대답이, “신부, 피양 마찬가지여!” 이는 곧 이승에서 행복하지 못하면 저승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제 엄마가 제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부터 행복을 누릴 줄 알아야 만이 하늘에서도 행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서, 지금 여기서부터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참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행복과 불행은 내 마음먹기에 달려 있고, 즉 一切唯心造이기에 주어진 모든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행복이란 만족滿足하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지금 힘들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갈 것이기에, 온갖 불행을 다 겪었음에도 행복했던 욥의 신앙을 본받아 하느님 안에서 행복한 존재와 행복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자고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해인 수녀님의 「1% 의 행복」 이란 시를 여러분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묻습니다. 행복하냐고 낯선 모습으로 낯선 곳에서 사는 제가 자꾸 걱정이 되나봅니다. 저울에 행복을 달면 불행과 행복이 반반이면 저울이 움직이지 않지만 불행 49% 행복 51%면 저울이 행복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행복의 조건엔 이처럼 많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단 1%만 더 가지면 행복한 겁니다. 어느 상품명처럼 2%가 부족하면 그건 엄청난 기울기입니다. 아마....그 이름을 지은 사람은 인생에 있어서 2%라는 수치가 얼마나 큰지를 아는 모양입니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1%가 빠져나가 불행하다 느낄 때가 있습니다. 더 많은 수치가 기울기 전에 약간의 좋은 것으로 얼른 채워 넣어 다시 행복의 무게를 무겁게 해 놓곤 합니다. 약간의 좋은 것 1% 우리 삶에서 아무 것도 아닌 아주 소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할 때의 평화로움, 따뜻한 아랫목 친구의 편지 감미로운 음악 숲과 하늘과 안개와 별, 그리고 잔잔한 그리움까지 팽팽한 무게 싸움에서는 아주 미미한 무게라도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단 1%가 우리를 행복하게 또 불행하게 합니다. 나는 오늘 그 1%를 행복의 저울 쪽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래서 행복하냐는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행복하다고. 』

오늘 독서에서 욥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19,25~27) 저는 아직 천국에 가보지 못해서 제 엄마가 이 곳에 사실 때 보다 그 곳에서 더 행복하게 사시고 계시는지 확실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욥의 신앙고백을 들으면서 전 마음의 위로를 느끼고 행복해 집니다. 제가 사랑했던 엄마가 이젠 눈물도 고통도 없는 그 곳에서 하느님을 뵈옵고, 생명이신 하느님의 영원한 행복 안에서 잘 살고 계시다고 느끼고 알게 되어서 마음이 참으로 편안해지고 행복해 집니다. 전 천국에서 제 엄마가 많이 아주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 엄마가 행복하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엄마가 행복하시다고 느끼기에 저도 행복합니다. 하지만 저는 가끔 이 곳에 엄마가 아니 계시기에 많이 슬프기도 하지만, 언제가 때가 되어 제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엄마를 다시 만나고 뵈올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행복해 집니다. 하느님 품 안에서 엄마가 저의 얼굴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시고, 엄마 또한 저의 간절한 소망처럼 엄마가 저를 기다리시면서 행복했으면 참 좋겠네요. 그래서 오늘은 엄마를 위해 열심히 기도(=위령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사실 엄마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기 보단, 살아 있는 제가 엄마처럼 신앙 안에서 죽음의 순간을 잘 받아들이고 거룩하게 죽을 수 있도록 기도한다고 봅니다. 저는 아버지와 엄마를 위해서 기도하고, 엄마와 아버지가 당신들을 만날 때까지 제가 이 곳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다시 만나도록 기도해 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랑했던 사람들 모두 하느님의 영원한 자비 안에서 영원히 참된 안식을 누리길 기도합니다. 저를 이 수도회로 초대해주고 인도해 주었던 마 레이몬드신부님과 박 도세 유스티노 신부님도, 비오와 도밍고 수사도, 그리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영혼들 또한 기도하고 기억합니다. 

<주님, 이미 세상을 떠난 돌아가신 저희 모두의 부모님들과 형제자매들 그리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은 불쌍한 연옥 영혼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베풀어 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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