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그 시각까지 깨어 있어야 할 우리는 / 셋째 미사/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11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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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11-01 | 조회수76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 시각까지 깨어 있어야 할 우리는 /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1102]셋째 미사 (마태 25,1-13)
죽은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은 죽은 이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세 대의 미사를 봉헌하는데 이는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단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기도할 것을 권장한다. “등만 가진 처녀들이 기름 사러 간 사이 신랑이 왔다. 기름까지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그 후 처녀들이 돌아와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죽음은 삶과 맞닿는단다. 그것은 죽음이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탈출하거나 인생무상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표징이 아니기에. 어쩌면 죽음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대한 결과요 열매이니까. 더 나아가 죽음의 순간과 그 결과 따라오는 하느님 만남은 거꾸로 우리 삶을 비추는 참된 빛이리라. 그리고 우리는 늘 이 순간을 기준으로 해, 내 삶을 반추하는 거울이다. 그 빛은 우리가 겉으로만 보이는 인생의 외적 가치를 넘어서는, 내면의 진리를 드러낼게다. 주님은 이 땅에 보내신 당신의 자녀가 비록 이승에서 저 못난 삶을 살고 돌아왔다고 해서, 그분은 당신 자녀에게 분노하시고 섭섭해 하실 리가 과연 가지시겠는가? 설령 온통 죄스럽게만 보일지라도 우리는 다른 이를 주님 마음이 되어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는 게 참 중요할 게다. 비록 우리 눈에는 부족해 보이고 결점 투성이로 보이는 이도, 비록 연약함의 한계에서 나름으로 최선을 다했으리라. 이런 주님 사랑을 깨닫고 사랑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면 빛 속에서 사는 삶이 된다. 곧 우리 인생의 멍에는 그만큼 가벼워질 것이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되는 것도, 우리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달릴 길을 다 달리고 눈을 감는 순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이도 죽음 앞에서는 불안해져 그의 믿음이 다소 흔들리기도 한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고통과 병고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가지셨다. 특히 인간의 마지막 고통인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셨을 뿐 아니라 눈물까지 흘리셨고 당신 친히 인간의 죽음에 동참하시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 이들에게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라고 고백한다. 자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주님 안에서 철부지가 된 이들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평화의 시작이다. 사실 우리는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연옥의 단련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연옥의 단련을 면하는 이들도 있을게다. 예수님처럼 다른 이들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이들, 곧 벗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는 이들이다. 그들은 고통 가득한 연옥의 단련 대신, 이미 이 땅에서 단련을 받은 이들이리라. 흔히 이런 이들을 우리는 성인이라 일컫는다. 곧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너희는 깨어 있어라.’ 하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늘 마지막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 죄로 찌든 우리 모습을 그분 자비에 맡겨드릴 수만 있어도, 그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될 게다. 그것은 그분 말씀에 충실하면서 영원한 삶을 위한 회개의 삶이어야 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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