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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제가 박해 당하면 우리 신자들은 나를 숨겨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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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백봉7 쪽지 캡슐 작성일2024-11-07 조회수127 추천수1 반대(0) 신고

 

 

 

 

 

 

2024년 나해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사제가 박해 당하면 우리 신자들은 나를 숨겨줄까?> 

 

 

 

 복음: 루카 16,1-8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오늘 복음은 약삭빠른 집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재산은 ‘성령’입니다. 하느님은 청하는 이들을 당신 집사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을 청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성령으로 이뤄지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는 곳에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는 수많은 다양한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약삭빠른 집사처럼 된다면 하느님은 그들을 당신 집사로 계속 삼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기 전의 집사처럼 한다면 쫓겨나고 말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사제가 되어보니 신자 중에서도 성령의 은총을 약삭빠르게 잘 사용하는 집사가 있는가 하면 낭비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이 일을 더 할 수 없을 때 드러납니다. 만약 제가 사제를 더는 하지 못하게 될 때 저를 맞아줄 신자들이 있을까요? 갑자기 자신이 없어집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는 신자들이 대부분 성직자를 죽이기 위해 찾았습니다. 그만큼 은총의 관리를 잘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렇게 교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중세 교회 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소설이 있습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 중에 ‘종교 재판관’ 부분입니다. ‘대심문관’이라고도 불립니다. 대심문관은 당시 종교 재판으로 사람들을 화형에 처하는 엄청난 권력을 지닌 고위 성직자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세상으로 돌아오시다가 대심문관을 만나 갇혀서 재판받는 형식을 취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마지막에 대심문관에게 마치 유다가 당신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입을 맞춥니다. 이 상징적 행위는 목매달아 죽은 유다처럼 종교가 죽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심문관은 예수님의 죄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당신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기는커녕 그것을 더 늘렸고, 인류의 영적 왕국에 영원히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당신은 사람의 자유로운 사랑을 바라시어, 사람이 자유롭게 당신을 따르며 당신에게 유혹당하고 포로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청지기가 바로 예수님처럼 해야 했습니다. 자유가 빼앗겼기 때문이 아니라 고마워서 자유롭게 자신을 받아들일 친구를 사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심문관은 종교는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종교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되고 통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인간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빵에 대한 유혹을 이긴 것을 비난하면서 중세 교회의 부유함을 통해 인류를 교회가 배를 불리게 만드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우리 발 앞에 놓고 우리에게 ‘우리를 너희의 노예로 삼아 먹이라.’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자유와 빵이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 자비는 행사되어서는 안 되며 종교 재판처럼 종교가 강한 힘으로 그들의 자유를 빼앗아 줄 때 그들은 신비로운 평화를 누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자신들이 쫓겨났을 때 자신들을 자유롭게 맞아줄 사람들을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닌 자신들에게 완벽히 통제되는 사람들로 만들려는 시도이고,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지금도 일부 성직자가 그러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은총을 관리하는 집사는 자신이 사제라면, 만약 사제 옷을 벗었을 때 자신을 맞아줄 사람들을 만드는 사람과도 같아야 합니다. 만약 자유를 빼앗는 존재였다면, 그들이 그를 맞아들여야 하는 자유를 갖게 되었을 때 자신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그를 받아줄 리가 없습니다. 프랑스 혁명 때는 성직자들이 얼마나 신자들에게 못되게 굴었는지 오히려 그들을 찾아내어 신자들이 죽이려 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를 생각해 봅시다. 박해 받는 땅에 처음으로 들어와 미사와 고해성사를 해 주었습니다. 그를 보호하기 위한 우리 신자들의 노력은 대단했습니다. 평신도 최인길은 주문모 신부가 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이 사제복을 입고 대신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쫓기는 주문모 신부를 목숨을 다해 보호한 강완숙 골롬바도 있습니다. 그가 체포령이 발효된 주문모 신부를 숨겨주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수많은 가족이 다 위험할 수 있어도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목숨을 걸고 은총을 신자들에게 베풀었습니다. 그러니 신자들도 주문모 신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평신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신도들도 은총을 받으니 은총의 관리자입니다. 박해 시대가 되었을 때 자신을 숨겨줄 친구를 그 은총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청지기만이 끝까지 주인이 칭찬해주며 자신의 집에 살게 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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