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오늘 금요일 제1독서 묵상을 하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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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 작성일2024-11-08 | 조회수79 | 추천수1 | 반대(3) 신고 |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교회 성도들에게 눈물로 호소합니다. 여기서 사도가 흘리는 눈물은 슬퍼서 흘리는 눈물일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필리피 공동체는 바오로 사도가 처음 유럽에 세운 첫 공동체이며 또한 무한한 애정을 가진 교회이며 자기 스스로의 입을 빌려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울 만큼 사랑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필리피 공동체를 향한 사랑의 눈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오늘 독서에서 강조하는 내용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또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지표를 알려주고 있는 듯합니다. 바로 십자가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지내기 때문에 더더욱 그와 정반대인 삶인 십자가와 원수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대해 처절한 안타까운 심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눈여겨볼 내용은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니 십자가와 원수로 살게 되면 그 끝은 멸망이라고 합니다.
저는 오늘 독서를 묵상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신앙인에게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십자가의 의미보다는 공동체 속의 삶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십자가의 사랑과 연결시켜야 하는가에 대해 묵상해봤습니다. 지금은 위령성월입니다. 위령성월은 특히나 죽음을 많이 묵상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고성올리베따노 아빠스님의 유튜브 강의 하나 봤습니다. 그날도 많은 생각을 하고 평소에도 많은 생각을 합니다. 비단 위령성월뿐만 아니라도 말입니다. 죽음은 누구나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경험하지 못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세계로 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세계의 존재 유무도 두려움을 안겨주는 원인 중 하나입니다.
만약 무신론자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건 어쩌면 자기가 무신론자로서의 소신을 가진 것에 대해 부정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진정 자기가 무신론자였다면 그냥 죽음 그자체에 대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또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바로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빌리면 그냥 살아있는 한 생명이 생명을 다해 끄져가는 불처럼 멸망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다만 무신론자라도 끄져가는 생명에 대한 아쉬움 정도라면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은데도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 무신론자는 자기가 죽음에 임박해서까지 가졌던 무신론에 대해 회개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우리가 일반적인 상식을 바탕으로 가정을 해 추론을 하면 이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일반적인 내용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오늘 독서의 내용을 한번 다시 들여다봤으면 합니다. 우리는 무신론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와 함께 그리스도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우리는 세례와 함께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또한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당신 홀로 부활하신 것이고 앞으로 우리의 부활은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의 종말이 올 때의 그때의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시기와 때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 시기가 천 년이 되었든 이 천년이 됐든 말입니다. 우리에겐 아주 먼 시간이 될지는 모르지만 하느님의 시간으로는 하루도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시간을 영원을 초월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가 역으로 말하면 죽음 이후의 세상을 부정한다고까지는 말할 수는 없으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죽음 이후의 삶을 잘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교회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믿고 받아들인다면 쉽지는 않지만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영원한 생명과는 거리가 먼 파멸의 시간 속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시간은 정말 잠시입니다. 지금 시간에서 봤을 땐 10년 20년 30년 남아 있는 것 같지만 그 시간도 언젠가는 눈앞에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어떻게 잘 보냈는가에 따라 우리의 영혼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경제법칙으로 보면 이 짧은 시간과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이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신 미친 도박과도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미친은 속된 표현인 미친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의 역설입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따져봤을 때는 미친 거래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중요한 이 시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몸으로 바뀌는 데 필요한 것에 투자하는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물론 그런 방법과 길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 수많은 방법 중 오늘 저는 딱 하나 공동체 생활을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공동체와 함께해야 함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지아무리 하느님과 자신만의 관계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해도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렇게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들 그건 온전히 하느님의 신성인 거룩을 실현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누구나 이런 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공동체와의 관계가 힘들어 할 때 이와 관련해서 신앙의 위기가 초래됐을 때 하느님만 바라보고 하느님과 일대일 그것만 생각하라고 말입니다. 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말도 아닙니다. 다만 이 말은 자신이 하느님을 떠나지 않고 하느님과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과 장치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치나 수단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또다른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엄청 큰 오산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착오가 될 것입니다. 그게 하나의 일시적인 방편은 될 수 있겠지만 완전한 길은 될 수 없습니다. 그게 만약 완전하고 온전한 길이 된다면 성경 곳곳에서 하느님께서 언급하신 주옥 같은 '사랑'을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이웃사랑입니다. 그냥 하느님만 사랑하라고만 하시면 될 것입니다.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는 지금 짧은 유한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남은 시간을 하느님을 위해서만 설령 산다고 해도 그 시간을 계산해보면 아주 짧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 수가 있을 것 같습니까?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육을 입고 있는 죄성을 가진 인간이라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계속 우리의 본성을 십자가상에서 흘린 예수님의 성혈로 우리 자신의 육을 죽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실현하지 않고서 그 어떤 수많은 공로를 쌓는다고 해도 그게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는 조금은 참작사유가 될지는 모르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게 만약 절대적인 조건이 된다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인간의 공로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하느님의 은총의 힘이 아주 보잘것없는 인간의 노력에 따라 좌우되는 결론에 이르게 돼 하느님의 권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권능으로 축소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는 당연한 결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고린토전서 13장 찬미가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그 엄청난 것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그냥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품을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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