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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수철 신부님_봉헌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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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11-10 조회수98 추천수6 반대(0) 신고

 

“회개와 주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시편146,1ㄴ)

 

가슴 섬찟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제 나눈 강론은 “성전정화”였고 오늘 복음의 주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이어지는 복음 주제는 “예수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뭔가 서로 관련되어 있는 불길한 느낌을 받습니다. 성전정화의 필요성이 더욱 크게 부각되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어제 저녁 식사중 수도원에 잠시 머물고 있는 교구 신부님의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앞둔 애로사항과 더불어 수사님들에게 기도를 청하는 이야기를 잠시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 교회는 물론이고 나라에 청년이, 젊은이들이 없구나! 이를 어쩌나!” 탄식과 더불어 고달픈 삶의 현장에서 희망을 잃고, 길을 잃고 헤매는 수많은 청년들이 생각났습니다. 전적으로 기성세대의 책임입니다. 세계 청년대회 주제 성구가 우리의 용기를 붇돋웁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신부님의 “전 교회가 회개하는 자세로 청년대회에 임해야 한다, 교회가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요지의 말에 전폭적으로 공감했습니다. 새삼 건물 잘 짓는 것보다 사람을 잘 키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정말 성전정화와 반드시 함께 가야할 “주님 중심의 회개와 봉헌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성전파괴에 대한 제자와 예수님의 주고 받는 대화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스승님,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장엄한 건물들입니까!”

감탄하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즉각적인 주님의 답변이 우리의 교회 현실을 들여다 보게 합니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내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해 있는 모래위 교회 공동체라면 그 위용을 자랑하는 성전건물도 텅 비워지고 날도 쇠락해 질 것입니다. 요즘 교회는 물론이고 곳곳에 빈 건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도대체 사람들이, 특히 청소년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삼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임을, 돈이 아니라 하느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전건물이 아니라 공동체 건물의 끊임없는 정화와 쇄신이, 기도와 공부가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내적으로 부패한 교회 현실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악순환의 사회 현실입니다. 앞서 복음은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는 내용입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장터에서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한 단죄를 받을 것이다.”

 

이런 유형의 성직자들은 없는지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게 됩니다. 진실과 겸손이 결핍된 무지와 허영의 율법학자들입니다. 무지와 탐욕과 더불어 내적으로 열정과 순수도 사라진, 길을 잃은 병든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이어 등장하는 부자들의 헌금 장면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부자들과 가난한들이 공존하는, 여전히 교회내의 빈부의 격차를 실감하게 되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빈부의 격차보다 더 심각한 것이 이념에 의한 좌우, 진보와 보수의 분열입니다. 흡사 심리적 내전상태를 방불케 합니다. 여전히 기상하자마자 바치는 만세칠창에 이어 내 신원의 고백입니다. 

 

만세칠창중 더욱 정성을 쏟는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기도입니다. 무엇보다 최악의 전쟁은 무조건 피해야 할 것이고 평화가 최상의 가치임을 절감하는 현실입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 평화의 전사다!” 만세칠창후 고백하는 제 신원입니다.

 

주님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습니다. 늘 깨어 우리를 살펴 보시며 돌보시고 계신 주님을 상징하는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늘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려는 노력으로 단풍 장엄하게 물든 불암산을 볼 때 마다 되뇌는 두 고백입니다. 9-11월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 가을에 저를 행복하게 하는 고백입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성전안에 헌금하던 부자들도 가난한 과부도 주님께서 주시하고 계심을 까맣게 몰랐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목하는 장면은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넣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가 연상되는 장면입니다. 당당하게 많은 돈을 헌금하는 부자들과 렙톤 두 닢을 부끄러이 바치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그러나 세리의 팔을 들어주었던 주님은 가난한 과부의 팔을 들어줍니다. 또 인용하고 싶은 내용입니다. 언젠가 지금은 세상을 떠난 가난한 자매가 꽃 한송이를 들고 왔을 때 드린, 하루 종일 저를 행복하게 했던 답시도 생각납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아마도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이보다 더 기뻐했을 주님이십니다. 가난한 과부의 하느님 향한 순수한 믿음의 봉헌에, 순수한 사랑의 봉헌에 감동하신 주님의 고백입니다. 제1독서에서 엘리야를 대접하던 사렙타의 과부 그 이상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빛나는 회개의 표지인 가난한 과부입니다.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시니 이를 교육의 기회로 삼는 주님의 처사가 참 기민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누가 내적으로 넉넉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참 부자인지 성찰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어 참 부자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가진 것들중 극히 작은 일부를 바친 인색한 부자들보다 가진 것을 다 바친 신망애(信望愛)의 과부가 참 넉넉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부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외아들 예수님 전부를 봉헌한 하느님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히브리서 말씀도 연상됩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티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당신을 고대하던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단 한 번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봉헌의 여정 중심에 영원한 봉헌의 모범이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 자리잡고 계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이런 주님의 봉헌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바치신 봉헌에 참여하는 참 거룩하고 아름다운 가난한 과부요 우리들입니다. 누구보다 하느님의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에 정통해 있는 가난한 과부는 교회의 빛나는 회개의 표지가 됩니다. 

 

정말 절박한 것은 장엄하고 화려한 건물 성전의 봉헌이 아니라 회개의 봉헌입니다. 깨어 있는 성전 사제라면 생활비 전부를 바친 가난한 과부의 삶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의 아니게 가난한 과부를 착취한 것같은 봉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라면 성전 사제의 죄가 참으로 엄중합니다. 정말 건물성전관리보다도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배려하는 공동체성전관리가 우선적임을 봅니다. 

 

가난한 과부들의 헌금이 모인 성전사제의 생활비라면 정말 써야 할때면 아낌없이 써야 하겠지만 절제는 몸에 배여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성전파괴의 예언도 작금의 교회가 내적타락과 부패의 늪에서 벗어나라는, 우리를 회개에로 부르시는 경고처럼 들립니다. 정말 교회나 수도원, 성지들의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들을 보면 가난한 신자들이 연상되고 우려하는 마음 큽니다. 정말 우선적인 것이 건물성전보다 공동체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유럽 성지들을 순례할 때도 옛 신자들의 크고 순수한 믿음에 감격하지만 그 이면에 얼마나 가난한 민초 신자들의 땀과 피를 흘렸을까 생각하면 마음 편치 않을 때도 참 많습니다. 병들고 시들어 죽어가는 공동체성전인데 장엄하고 화려한 건물성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참으로 믿는 이들의 순례 공동체에 속한 우리들이요 봉헌의 여정중의 우리 삶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주님 중심의 교회공동체로 끊임없이 정화되고 숙성(熟成)되고 새로워질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아멘. 

 

성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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